25일 오후 안동시 경국대학교에서 바라본 산불 모습. 독자 제공
지난 22일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25일부터 경북 동북부 대부분이 산불에 고립되고 있다.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천문학적인 피해를 내 ‘괴물산불’로 불려지는 이번 산불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재앙 수준’이라는 게 주민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25일 경북도 등에 따르면 의성 산불은 지난 24일 안동시 길안면까지 번진 것에 이어 25일에는 안동 풍천면과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까지 번지고 있다.
특히 안동 풍천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흩어져 있어 관계 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불길이 겉잡을 수없이 번지고 있지만 산불 현장에는 며칠째 강한 바람이 계속돼 진화 속도가 번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진화율은 바람 방향이나 풍속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있다.
◆성묘객 실수로 산불 발생=지난 22일 오전 11시 24분쯤 경북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 정상 부근에서 산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군청의 연락을 받고 현장을 찾은 마을 주민 A씨는 산에서 내려오는 성묘객 B씨(50대)를 발견했고, 그는 자진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성군과 경찰 등은 최초 신고 당시 상황 등을 미뤄 성묘객 일행의 실수로 산불이 난 것으로 보고 진화 작업이 끝나는 대로 조사를 할 방침이다.
안평면에서 최초 산불이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2일 오후 2시 39분쯤엔 인접한 안계면에서도 산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두 건의 산불 신고가 접수된 뒤 산림·소방당국은 산불 대응 단계를 차츰 상향하고 헬기 수십대를 투입하며 대응에 나섰지만 현장에서는 순간풍속 초속 20m 안팎의 강풍이 불어 진화에 애를 먹었고 결국 초기진화에 실패했다.
진화대원들이 25일 오후 안동시 길안면 만휴정에서 산불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다. 만휴정은 결국 불길에 휩싸였다. 경북도소방본부 제공
◆당국의 초기 대응 실패가 원인=강풍 등 진화에 불리한 기상 여건과 전문 인력·장비 부족 등이 맞물려 초래된 당국의 초기 대응 실패가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산림청 등에 따르면 지난 22일 의성군 안평면·안계면 2곳 야산에서 불이 나자 진화 헬기 수십 대와 인력·장비 등을 대거 투입해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화재 발생 첫날부터 산불 현장에는 초속 10m가 넘는 강풍과 극도로 건조한 날씨 등이 맞물린 불리한 진화 여건이 조성됐고 이런 상황은 나흘째 이어졌다.
이런 까닭에 불씨가 강풍을 타고 수십∼수백m를 날아가 바싹 마른 나무와 낙엽 등에 옮겨져 또 다른 불이 발생했고 이처럼 곳곳에서 발생한 불이 다시 합쳐지면서 의성 산불은 몸집을 키워나갔다.
화세를 키운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초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북동쪽 지역으로 확산했고 현재 안동·청송·영양·영덕 등 4개 시군으로까지 번진 상황이다.
기상 악조건과 함께 산불 진화 핵심 장비인 진화 헬기 대부분이 초기 진화에 필요한 물을 공중에서 충분히 뿌릴 수 없는 중소형 기종이란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이번 산불 진화에 동원된 진화 헬기 상당수는 담수량 1000∼2700리터 규모의 중소형 기종이다. 군이 지원한 헬기도 담수량 5000리터 이상 초대형 진화 헬기는 소수에 그쳤다.
이런 탓에 헬기 조종사들은 담수 후 현장에 재투입되면 강풍으로 산불이 더 크게 번져 있는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를 두고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지난 23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초반에 2만~3만리터 이상 소화 가능한 수송기를 동원해야 진화할 수 있고 불이 커지고 난 다음 적은 용량의 헬기로 끄려고 하면 불이 더 번지고 진화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산세가 험한 현지 지역에서 지상 진화 및 확산 방지, 잔불 정리 등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인력이 부족한 점도 보완해야 할 요소로 지적됐다.
산림 당국 관계자는 “진화에 특화된 산림청 공중진화대와 특수 진화대, 119 산불특수대응단 등 전문 인력을 정예화하고 더 늘려야 순식간에 대형화하는 산불에 대응할 수 있다”며 “산불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고려하면 선진 진화 장비 도입과 전문 인력 확충에 예산을 더 투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북도소방본부 제공
◆강풍 타고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으로 확산=소방청이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하고 가능한 모든 인력과 장비가 현장에 투입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산불은 확산을 멈추지 않고 있다.
22일 안평면에서 시작한 산불은 강풍을 타고 동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불은 옥산면과 점곡면 등 의성군 동부를 지났고 24일에는 안동시 길안면, 남선면, 임하면 등에서도 불길이 목격됐다.
이 과정에서 상승기류 타고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현상이나 불기둥에서 떨어진 불씨가 산과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명 ‘도깨비불’로 불리는 ‘비화’(飛火) 현상이 곳곳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산불 발생 나흘째인 25일에도 진화작업이 계속됐지만 풍향이 수시로 바뀐 탓에 산불은 동쪽과 북쪽 양 갈래로 나뉘어 겉잡게 수없이 번져나갔다.
25일 오후에는 의성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해 한 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병산서원과 직선거리로 불과 10㎞ 떨어진 곳까지 불길이 번지기도 했다. 다행히 풍향이 바뀌면서 하회마을·병산서원 쪽으로 번지던 불은 기세가 누그러진 상태다.
의성군 옥산면에서 안동시 길안면 방향으로 번지던 불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촬영지로 잘 알려진 만휴정과 근처 묵계사원을 삼킨 뒤 계속 동진했다. 이 불길은 25일 오후 안동을 넘어 청송군과 영양군, 영덕군까지 번졌다.
◆대피 인원만 5000여명…인명 피해까지 발생=이번 불로 대피한 주민은 어림잡아 5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소방관 1명이 부상한 것을 제외하고 인명피해가 없었지만 25일 오후 청송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25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쯤 청송군 청송읍 한 도로 외곽에서 A씨(65)가 소사한 상태로 행인에게 발견됐다. 경찰이 유족에 확인한 결과 A씨는 산불 대피 명령에 따라 자가용을 이용해 대피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발견 당시 A씨는 차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대피하던 중 산불에 휩싸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다른 사망 원인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성군과 경북도는 산불 초기 의성지역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 중이던 33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화재 발생 당시 의성 관내 3개 병원과 1개 요양원에는 346명이 입원해 있었다.
의성군 등은 귀가 또는 외박을 택한 일부 환자를 제외한 337명을 보건소와 소방서 등에 소속된 구급차와 버스를 이용해 안동과 문경 등지로 옮겼다.
중증응급의료센터와 구급상황관리센터 등과 합동으로 모바일 상황실을 활용하는 등 체계적으로 이송이 이뤄진 덕분에 별다른 인명피해는 발생하지는 않았다.
환자 이외에도 의성의 산불 영향구역에 살던 주민 수천명도 대피명령 등에 맞춰 순조롭게 대피했다. 불이 안동과 청송, 영양, 영덕까지 번지면서 길안면과 풍천면 등지에서도 수천명이 대피하는 등 당국은 5000여명이 대피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안동시 제공
◆천년 고찰 소실에 세계문화유산까지 ‘위기’에 봉착=산불로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한 천년고찰 의성 고운사가 불에 타는 등 문화재 소실도 잇따랐다.
25일 오후 4시 50분쯤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가 불에 탔다. 신라 신문왕 1년(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운사는 경북을 대표하는 사찰 중 하나이다.
보물 제2078호로 단청이 유명한 고운사 연수전도 불에 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운사가 소장 중이던 보물 제246호 석조여래좌상 등 유산은 화마가 덮치기 전 다른 곳으로 옮겨져 소실을 면했다. 승려들도 미리 피신해 화를 입지는 않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안동시 길안면 만휴정도 불길을 피하지는 못했다.
안동시 등은 지난 24일 오후 길안면과 의성군 옥산면 경계 지점에 불꽃이 목격된 뒤 만휴정 주변에 소방장비 등을 배치해 건물에 물을 쏟 아붓고 불길에 대비했다. 이런 노력에도 만휴정은 이날 오후 불길에 휩싸였다. 배우 이병헌과 김태리가 서로를 바라보던 장면의 배경이 됐던 만휴정은 볼 수 없게 됐다.
만휴정뿐만 아니라 보백당 김계행을 배향한 묵계서원과 안동 용담사 등도 불길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꼽히는 안동 봉정사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산림 당국은 25일 3500ℓ 상당의 진화용수를 실은 차량(유니목) 9대와 인력 50여명을 서후면 태정리에 위치한 봉정사에 투입했다. 진화 대원들은 사찰 주변에 지연재가 섞인 용수를 1시간 넘게 뿌리며 화재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국보 15호인 극락전, 대웅전 벽화 등이 있는 봉정사 내부에서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비상이 걸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천년고찰 의성 고운사가 불에 탔다는 소식도 긴장감을 더했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이날 봉정사를 방문해 수장고 등 관련 시설을 둘러보며 국가 지정 유산의 이송 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산불 발생 첫날인 지난 22일에는 의성군 안평면에 있는 비지정 문화재인 운람사의 전각과 부속건물 등이 전부 불에 탔다. 운람사에 있던 아미타삼존, 탄생불, 신중탱화 등 문화재급 유산은 불길이 덮치기 전 근처 조문국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실을 피했다.
안동시 제공
◆철도에 고속도로·국도까지 통제=확산하는 산불로 고속도로와 국도에 이어 철도 교통까지 통제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코레일은 산불에 따른 사고를 막기 위해 지난 22일 오후 중앙선 안동∼경주 구간의 운행을 중단했다.
열차는 통행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코레일은 25일 오후 중앙선 영주∼경주 구간의 운행을 다시 중단했다.
한국도로공사도 화재 첫날 중앙고속도로 안동분기점(JCT) 주변, 서산영덕고속도로 서의성나들목(IC)∼안동JCT의 양방향 통행을 통제했다.
도로공사는 진화 정도와 불길의 방향에 따라 일부 구간의 통행을 재개와 통제를 반복했다.
25일 오후 5시 기준 산불로 통행이 제한되는 고속도로는 서산영덕고속도로 서의성IC∼영덕IC 94.6㎞ 구간 양방향, 중앙고속도로 의성IC∼서안동IC 37.6㎞ 구간 양방향이 통제되고 있다.
철도와 고속도로 외에도 의성과 안동을 지나는 일부 국도와 지방도도 연기로 뒤덮인 곳에서는 통행이 통제되고 있다. 의성군 안사면 사무소도 소실됐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이번 산불의 산림 피해 면적이 1만 2699㏊에 달해 단일 면적 기준으로 역대 1위인 2000년 동해안 산불(2만 3794㏊)과 2위인 2022년 경북 울진·삼척 산불(1만 6302㏊a)에 이어 현재 역대 3위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