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론자인 기성 외교·안보 세력 누르고 자제론자 득세
우선론자와 짝을 이뤄 외교·안보 진영 장악
중국과는 비군사적 지정학적 경쟁 관계 모색
우선론자와 짝을 이뤄 외교·안보 진영 장악
중국과는 비군사적 지정학적 경쟁 관계 모색
제이디(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 4일 워싱턴에서 열린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에 대한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콜비를 소개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대외정책에 대한 노선 투쟁에서 새로운 외교·안보 세력인 ‘자제론자’(restrainer)들이 승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러시아와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회담 합의, 이를 고리로 한 러시아와의 접근, 유럽 등지의 동맹에 대한 미국의 방위 역할 축소, 국방비 삭감, 중국과의 지정학적 대결 지양 등의 흐름이 뚜렷해지거나 형성되고 있다. 자제론자라는 새로운 외교·안보 세력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결과이다. 반면, 미국의 전세계적인 우위와 패권을 추구하며 미 국력의 전세계적 전개를 주장하던 기성 외교·안보 세력들이 퇴조하고 있다.
■ 자제론자, 우선론자, 패권론자…트럼프 진영 내의 대외정책 세 그룹
자제론자들은 미국의 군사력 등 국력이 해외에서 과잉 전개됐다며 축소·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제론자들의 등장 배경에는 미국이 지난 20년 동안 대외정책에서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상주의에 기반해, 국외에서 지나친 개입을 하며 국력을 과잉 전개했다는 반성이 있다.
특히, 조 바이든 전 행정부가 ‘민주주의 대 전제주의’라는 가치연대에 기대어 추진하다가 지나친 국외 개입을 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바이든 전 행정부가 동맹의 복원,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유지와 확장에 매달리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의 개입과 부담을 증폭시켰다는 비판이다. 중-러 진영과의 대결이 격화되고, 글로벌사우스(남반구와 북반구 저위도 개발도상국)의 등장으로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은 축소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기존 대외정책에 회의적인 트럼프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내에는 자신들을 “미국 우선주의 보수 현실주의자(리얼리스트)”라고 이르는 그룹들이 생겨났다. 이 그룹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뉠 수도 있다. 첫 진영은 중동과 유럽에서 미국의 역할을 축소하고 중국에 집중해야 한다는 ‘우선론자’(prioritiser)이다. 다른 진영은 국외에서 미국의 군사력 개입을 가능한 한 축소해야 한다는 ‘자제론자’들이다.
트럼프가 2016년부터 미국 보수 진영에서 득세한 이후 트럼프 1기 행정부와 공화당에서는 이런 자제론자와 우선론자들이 기존의 ‘패권론자’(primacist)들과 각축하며 힘을 키워왔다. 패권론자들은 미국이 전세계적인 지도력과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패권론자들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대외정책을 사실상 주도했다.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 부통령 마이크 펜스,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주유엔 대사 니키 헤일리 등이다.
이들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트럼프의 ‘영원한 전쟁’ 종식이라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반대하고,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서는 완전히 배제됐다.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네오콘들을 축출하겠다”고 공언했고, 그의 아들 트럼프 주니어도 네오콘 배제를 주장했다. 두번째 집권한 트럼프는 이제 더 이상 기존 워싱턴 세력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2기 내각을 트럼프는 국외에서 미 군사력 사용에 비판적이거나,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인사들로 채웠다. 미국 정보기관을 관할하는 국가정보국(DNI) 국장에 국외 군사 개입에 가장 비판적 목소리를 낸 털시 개버드 전 민주당 하원의원을 기용했다.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네오콘 성향의 강경 매파였으나, 트럼프주의자로 완전히 전향하고 트럼프에 충성을 맹세했다.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도 방송인 출신의 트럼프 충성파이다.
공화당 내에서도 오래전부터 미국의 국외 개입 자체를 비판하던 랜드 폴 상원의원을 위시해 마이크 리 상원의원, 웨슬리 헌트 하원의원들이 포진하고 있다. 마가 운동의 이론가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전략수석, 리처드 그리넬 특별임무 담당 특사 등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 지원 중단과 동맹에 대한 방위 의무 축소 등을 주장해왔다. 특히 상원의원 시절에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로 의회에서 활동했던 제이디(J.D.) 밴스 부통령은 현재 미국 대외정책에서 자제론을 상징한다.
엘브리지 콜비 미국 국방부 정책차관이 지난 4일 워싱턴에서 열린 상원 인사청문회에 참석해 있다. AFP 연합뉴스
■ 경계가 흐릿한 자제론자와 우선론자…콜비 국방차관이 이론적 좌장
트럼프 진영 내의 우선론자들은 중국이 미국에 심각하고 존재론적인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며, 미국의 국력을 중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2009년 1월~2017년 1월) 이래 미국이 추진한 중동 수렁 탈출 및 중국과의 대결을 위한 아시아태평양으로 귀환이라는 노선과 대체로 일치하나, 이들은 중국 대처에 더 집중을 주문한다. 조시 홀리 상원의원 및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콜비는 우선론자뿐만 아니라 자제론자 진영을 아우르는 이론적 좌장이다.
이들은 격화되는 중국과의 대결로 유럽·중동에서 미 군사력 철수와 대만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이 불가피하다고까지 보기도 한다. 특히 콜비는 주한미군을 대북한 억제가 아니라 대중국 대결로 돌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은 미국이 전세계적 차원에서 두개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 홀리 의원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스웨덴과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반대하며 나토 확장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했다.
하지만, 콜비 차관은 미국이 중국에 집중해야 하나, 중국과의 전쟁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데에는 회의적인 자제론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선론자와 자제론자의 경계는 사실 흐릿하다. 우선론자와 자제론자를 넘나드는 이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국방부 실무 관료로 주로 배치됐다. 중동에서 미 군사력 축소를 오래전부터 촉구해온 마이클 디미노 중동 담당 부차관보를 비롯해, 앤드루 바이어스 남아시아·남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 오스틴 다머 전략 담당 부차관, 콜비 차관의 알렉산더 벨레즈그린 선임보좌관 등이다.
앤드루 바이어스 남아시아·남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 미국 국방부 누리집
■ “중국과는 차가운 평화”…중국과 전쟁할 정도로 대만은 가치 없어
이 중에서 바이어스 국방부 남아시아·남동아시아 담당 부차관보와 랜들 슈웰러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는 트럼프 현실주의 전도사 구실을 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아메리칸 보수주의자’에 기고한 ‘중국과의 차가운 평화’에서 “중국의 인도·태평양 인근 국가 및 유럽, 그리고 미국과의 교역과 투자의 광대함과 지속적 성장은 상호 확증적 파괴보다는 상호 확증적 생산의 미래를 시사한다”며 “강대국 관계는 잘 관리되면 차가운 평화, 즉 경쟁자들이 군사적 사용을 피하고 비군사적 형식의 지정학적 경쟁에 관계의 초점을 맞추는 적대적 평화 형태로 남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동맹이 아닌 대만은 중국과의 전쟁을 치를 정도로 가치가 없다”며 “대만의 무장과 자주방위를 도와서 중국의 침공을 억제하는 한편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권고했다.
다머 국방부 전략 담당 부차관은 콜비 차관의 싱크탱크인 ‘마라톤 이니셔티브’에 한 ‘거부 전략의 재원 조달’이라는 기고에서 미 국방비에 따른 미국의 세계전략을 분류했다. ‘거부 전략’이란 콜비 차관의 대중국 전략 명칭으로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다머 부차관은 미국이 전세계적인 우위에 서는 패권전략을 선택한다면, 국방비는 9.5%씩 해마다 증가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국방 예산이 현 수준에 머문다면, 미국은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북부로 이어지는 제1열도선을 따라서 전력과 자원을 우선 배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방비가 10% 준다면, 미국은 동맹국들에 방위비 부담 전가를 가속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취임 이후 향후 5년 동안 국방 예산을 매년 8%씩 줄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 방위비 부담 전가를 더욱 압박할 것이 분명한 대목이다.
수브라마냠 자이샹카르 인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4일 파이낸셜타임스와 한 회견에서 트럼프가 현실주의자라는 질문에 “그렇다. 하지만 믿음, 신념, 느낌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트럼프는 매우 강력한 민족주의자이며, 민족주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계 각 지역에 대해 매우 현실주의자다”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집권 이후 자제론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자제론자, 우선론자, 패권론자란
자제론자(restrainer) 군사력 등을 통한 국외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룹
우선론자(prioritiser) 중동 및 유럽에서 역할 축소하고 중국에 집중해야 한다는 그룹
패권론자(primacist) 전세계적 지도력 유지해야 한다는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