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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반도와 남중국해 등 주요국 전략자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해드립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격주 화요일 풍성한 무기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쿠르스크 전선에서 파괴된 우크라이나 T-64BV 전차를 찍은 사진을 이달 17일 러시아 국방부가 배포했다. 쿠르스크=AP 뉴시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안보 홀로서기에 나선 유럽이 최근 8,000억 유로(약 1,270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마련해 향후 5년 동안 군사력 현대화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예산 가운데 6,500억 유로는 유럽연합 회원국 각 정부가 국방예산을 증액해 조달하고, 1,500억 유로는 EU 예산을 담보로 무기 공동조달 사업을 위한 대출을 받아 충당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돈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개발·생산되는 재래식 무기 구입에 사용될 계획이다.

안보 홀로서기 나선 EU...8000억 유로 들여 재래식 무기 증강



EU가 막대한 예산을 조성해 대규모 재래식 무기 구매 계획을 세우면서 유럽 주요 방산업체들의 주가는 폭등했다. 주로 지상장비와 탄약을 생산하는 독일 라인메탈 주가는 최근 한 달간 37% 넘게 올랐고, 이탈리아 레오나르도는 28%, 영국 BAE시스템스는 22% 올랐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합자기업인 KNDS의 경우 매출이 폭등하면서 설립 10여 년 만에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고 있을 정도다. 유럽 각국 정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미국에 대한 무기 의존도를 낮추고 독자적인 방위 능력을 갖추겠다고 천명하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거짓말이다.

EU는 3년 넘게 지속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가 대규모 재래식 군비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물론 서방 매체들이 여러 차례 보도한 바와 같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본 러시아는 제조업 전반의 심각한 인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고, 이 때문에 재래식 무기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으로 재래식 군사력을 복원해 유럽을 침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지금 당장 전쟁을 끝내고 10년 이상 현재와 같은 수준의 군비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는 러시아는 소련의 전철을 밟으며 체제 붕괴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달 17일 러시아 쿠르스크주 수자 지역 스타랴야 소로치마 마을에서 러시아군 병사가 한 가정집 지붕에 부대 깃발을 걸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13일 수자를 탈환했다고 주장했고 우크라이나는 이를 부인했다. 쿠르스크=AP 뉴시스


EU의 군비 증강 목적이 대외적으로 천명한 바와 같이 자체 방위 능력 확보에 있었다면, 8,000억 유로의 대부분은 전차나 장갑차, 전투기와 같은 무기를 구매하는 재래식 군비 증강이 아닌, 정보 능력 강화에 지출할 계획이 수립됐을 것이다. 정찰위성이나 정찰기, 감청 시스템과 이러한 자산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는 정보 분야부터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유럽 독자 방위 능력 확보의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우수한 첨단 무기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어도, 적의 공격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하고 선제공격을 허용한다면,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전차나 1,000억~2,000억 원짜리 전투기는 값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EU의 8,000억 유로 군사력 현대화 계획에는 이러한 정보 자산 증강을 위한 예산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고작’ 8,000억 유로의 돈으로는 현재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제공하고 있는 정보 능력을 대체할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EU의 군비증강은 독자적 방위 능력 확보보다는 정치권과 연결된 방산업체들의 이익과 일자리 창출 목적이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방부 산하 9개 정보기관이 매년 102조 원 넘게 예산 쓰는 미국



미국에는 흔히 알려진 중앙정보국(CIA) 외에도 20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정보기관들이 존재한다. 국방부 산하에만 공식적으로 9개의 정보기관이 운영되고 있는데, 이 많은 기관들은 매년 700억 달러(약 102조 원)가 넘는 예산을 쓴다. 이 돈은 지금도 전 세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감시하고 있는 각종 위성과 정찰기, 감청 네트워크를 유지·개선하는 데 쓰이고 있다.

미국 공군의 RQ-4 글로벌호크 정찰기. 연합뉴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자산 구축에 이처럼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이유는 각 정보자산이 그만큼 비싸기 때문이다. 정찰위성 1기는 발사 비용을 제외한 순수 위성 가격만 2억~5억 달러가 넘는다. 위성의 공전주기를 고려해 전 지구에 대한 상시 감시 능력을 갖추려면 수십 기의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아야 하고, 길어야 5년인 위성의 수명을 고려해 매년 여러 기의 위성을 끊임없이 발사해야 한다. 물론 이는 ‘광학정찰위성’ 한 종류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적외선·조기경보·통신·항법위성 등까지 고려하면 매년 수십 기의 크고 작은 위성을 발사해야 한다.

정찰기도 고가의 자산이다. 미국은 전자광학·레이더 장착 정찰기 외에도 통신 감청·대기·수중 음향 정보 수집 등 용도에 따라 특화된 다양한 정찰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정찰기는 RQ-4 ‘글로벌호크’의 경우 1대에 2억 달러, ‘P-8A AAS’로 별도 분류되는 다목적 초계기의 경우 1대에 3억 달러가 넘는다. 2025년 3월 현재 미국은 공군에만 이러한 감시정찰용 항공기를 400대 이상 보유하고 있다.

미국, 첨단 위성·정찰기와 분석 시스템·노하우로 가공할 정보 능력 갖춰



정보 능력은 고가의 첨단 위성과 정찰기를 대량으로 구매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자산이 수집한 첩보(Intelligence)를 취합해 유용한 정보(Information)로 가공하기 위한 분석 시스템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과 노하우를 쓸 만한 수준으로 구축하는 데는 수십 년의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라는 경험도 필요하다.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중 쿠르스크 전역은 미국의 정보 능력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정보 능력이 단순한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을 넘어 전쟁의 흐름과 국제정세의 판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된 북한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서방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들을 동원해 러시아 본토 쿠르스크를 침공한 우크라이나군은 삽시간에 서울 면적의 몇 배에 달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러시아는 북한군까지 동원한 대병력을 투입해 영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야 했다. 러시아군의 인명피해가 얼마나 심했냐면, 지난해 11월부터 제한적으로 투입된 북한군에서만 4,0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을 정도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이 언제, 어디서, 어떤 규모로 공격해 들어올지 전부 알고 있었고, 유리한 지형에서 드론과 박격포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식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드론 운용병 1명이 러시아군 77명을 사살하고 4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례도 보고될 정도였다.

미국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 쿠르스크 전선의 전황



그런데 석 달 가까이 우크라이나군의 일방적 승리로 유지되던 전선이 단 사흘 만에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미국이 정보 제공을 중단하자 ‘장님’이 된 우크라이나군은 이전처럼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기습공격을 얻어맞은 우크라이나군은 패닉에 빠졌고, 다량의 장비를 유기한 채 몸만 빠져나갔다. 러시아군 기갑차량들을 압도하며 맹위를 떨쳤던 우크라이나군의 서방제 장비들, M1A1 에이브람스 전차나 M2A2 브래들리 장갑차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러시아군에 노획됐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우크라이나군 수천 명도 포로가 됐다. 쿠르스크 지역이 향후 평화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협상카드로 쓰일 예정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달 초 쿠르스크 전선 붕괴는 우크라이나에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그리고 이 패배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보 지원을 중단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단 한마디 때문에 벌어졌다.

이달 13일 러시아 군인들이 쿠르스크 수자 지역의 건물 잔해를 수색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 지역 중심지인 수자를 완전히 탈환했다"고 주장했다. 쿠르스크=AP 뉴시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북한군에 비해 압도적인 질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첨단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지만,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북한의 기습적인 도발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정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감시정찰위성을 연이어 쏘아 올리고 신형 백두·금강 정찰기를 전력화한 사례를 들며 우리 군 정보 능력도 상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에 고작 두 번 한반도 상공을 통과하는, 그것도 상업용 위성보다 떨어지는 수준의 해상도를 가진 광학정찰위성과 SAR 위성 몇 개를 쏴 올렸다고 해서, 북한에 의해 모든 동선이 추적되고 있는 비즈니스 제트기 기반의 초보적인 정찰기가 몇 대 있다고 해서 필요한 만큼의 정보 능력이 갖춰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 작전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궤변이다.

지금도 우리 정부와 군에는 “필요하면 연합자산을 가져다 쓰면 될 일”이라며 정보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관료와 장성들이 꽤 많다. 쿠르스크 전선 붕괴 사례를 보며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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