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신성장 전략 특별기획 : 조선·방산]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 정책들이 세계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취임 이후 각종 행정명령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가운데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무차별 관세 폭격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수입상대국 1~3위 국가인 멕시코·중국·캐나다가 첫 타깃이 됐다. 3월 12일부터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했다. 자동차·반도체 등에 대한 품목별 관세와 4월 2일 국가별 ‘상호 관세’도 예고했다. 상호관세는 전 세계, 전 품목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파급력이 훨씬 클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도 사정권에 들었다. 미국이 상호관세를 통해 기존 무역 질서를 일단 뒤집어 놓은 상태에서 4월 이후 개별 협상을 벼르고 있어 미국 입장에서 8대 무역 적자국인 한국을 향한 통상 압력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월 17일(현지 시간) 발표한 중간 경제전망에서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1.5%로 0.6%포인트 큰 폭으로 하향 조정했다. 미국발 관세전쟁의 타격을 직접적으로 받는 멕시코·캐나다를 제외하면 주요국 중 하락폭이 가장 크다. 한국 경제가 다른 주요국에 비해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장벽 확대 정책에 더 취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2.0 시대를 맞은 한국 산업계에는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고 있다. 한경비즈니스는 ‘트럼프 리스크’를 도약의 기회로 바꾸고 있는 기업들을 조명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바탕으로 트럼프 2.0 시대에 정책 특수와 반사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는 △조선·방산 △전력기기·전선 △태양광·정유 등 6개 분야를 중심으로 기업들의 필승 전략을 살펴봤다. [편집자 주]
해군에 인계돼 출항 중인 충남함. 사진=HD현대중공업
조선·방산 분야는 트럼프 2.0 시대 가장 큰 수혜업종으로 주목받고 있다. 방산은 미국으로의 수출이 거의 없고 조선산업은 미국이 자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한국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관세 무풍지대로 꼽히고 있다.
한국은 미국이 중국과 치열한 전략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조선업의 최우선 협력 파트너다. 전문가들은 조선업을 지렛대 삼아 반도체·자동차·철강 관련 관세전쟁에서 대미 통상 압력을 누그러뜨리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 한국에 ‘조선 협력 러브콜’을 보낸데 이어 최근 의회 연설에서 “상선과 군함 건조를 포함한 미국 조선업을 부활시키겠다”며 “백악관에 새로운 조선 (담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조선산업을 미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특별 세제혜택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에 미 해군 군함 건조를 맡길 수 있게 하는 ‘미국 선박법’, ‘해군준비태세보장법’, ‘해안경비대준비태세보장법’이 잇따라 발의되며 조선산업 기반 확대 정책이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 조선업체들의 미국 군함 시장 진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물 만난 K조선, HD현대·한화 美 최우선 협력 파트너로
미군 해군 함정 보유 목표. 그래픽=송영 기자
의회예산국(CBO)이 미 해군의 ‘2025 건조 계획’을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해군은 군함을 2024년 295척에서 2054년 390척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앞으로 30년간 전투함 293척과 군수·지원함 71척 등 총 364척의 군함을 새로 구매할 계획이다.
총 건조 비용은 1조750억 달러(약 1600조원)이며 잠수함이 총 건조 비용의 49%를 차지한다. CBO는 “향후 30년간 연평균 조선비용은 지난 5년간의 평균 예산보다 46% 많다”며 “최근 예산뿐 아니라 역대 기준과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미국 선박의 ‘보수·수리·정비(MRO)’ 사업 규모는 연간 20조원 정도로 예상된다. 잠수함이나 함정의 운영 기한은 최대 40년으로 주기적인 유지·보수·정비를 받아야 한다. 잠수함 한 척이 인도되면 수십 년간의 MRO 수요가 발생하는 구조다. 올해 미 해군은 10척 안팎의 물량을 발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지난해 이미 미 해군 함정 MRO 사업 진출에 필요한 함정정비협약(MSR)을 체결한 상태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미 해군 7함대의 3만 톤급 급유함 MRO 계약 수주에 성공했고 같은 해 8월에는 해군 군수지원함 MRO 사업을 수주했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3월 7일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생도들과 만남을 갖고, 미래 해양 분야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사진=HD현대
HD현대는 지난해 7월 미시간대, 서울대와 조선산업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 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은 후 공동연구 및 교육, 인턴십 프로그램 도입 등 미국과의 조선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조선·해양 분야의 미래 발전 방향과 연구과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MRO 사업을 넘어 미 해군 군함 건조사업 수주도 노리고 있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12월 북미 조선·방산 시장의 진출 거점으로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한데 이어 최근 호주 조선·방산 업체 오스탈 재인수에 나섰다.
한화는 3월 17일 호주증권거래소 장외거래를 통해 오스탈의 지분 9.9%를 직접 매수했다. 해당 지분 외에도 호주 현지 증권사를 통해 추가로 9.9% 지분에 대한 TRS(총수익스와프)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약 19.9%의 지분을 확보해 오스탈의 경영권을 가져온다는 계획이다.
오스탈은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다. 미 해군 4대 핵심 공급업체로 142억 호주달러(약 13조1000억원)에 달하는 수주잔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내에선 소형 수상함과 군수지원함에서 시장점유율 40~60%를 유지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3월 17일 한화시스템과 함께 오스탈 인수에 나섰다는 소식에 18일 주가가 1.46% 오른 76만4000원에 장을 마감했다. 한화시스템은 상장 후 최고가 기록을 썼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34조원)는 네이버(33조원)를 제치고 시가총액 9위에 올랐다. 시총 8위인 기아(38조원)를 약 4조원 차이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한화그룹이 재인수를 추진 중인 오스탈 호주 조선소 전경. 사진=한화
한화 관계자는 “이번 지분 인수는 글로벌 방위산업과 조선산업의 호조 속에 오스탈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호주뿐 아니라 나아가 미국까지의 전략적 파트너십 강화가 목표”라며 “한화의 글로벌 상선 및 함정 분야에서 입증된 건조 능력과 미 국방부 및 해군과의 단단한 네트워크에 오스탈의 시너지가 더해진다면 향후 수주 확대가 예상된다”고 했다. 시장에서는 한화가 필리조선소는 상선, 오스탈은 군함 건조를 위한 야드로 활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에서 열린 대담에서 미국과의 적극적인 협력 의지를 피력했다. HD현대중공업은 울산과 필리핀 등에 갖춰진 자체 도크와 설비, 인력 등을 활용한 미 해군 함정 건조 방식과 한화오션처럼 미국 조선소 인수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HD현대중공업은 미국의 안보 동맹국 중 미국과 유사한 사양의 이지스 구축함을 성능·비용·납기 측면에서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라며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한 국내 이지스함의 성과 역시 미국과의 방산 협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HD현대중공업 야드 전경. 사진=HD현대
K방산, 가성비·빠른 납기 앞세워 ‘바이 유러피안’ 견제 뚫는다
트럼프 2.0 시대는 한국 방산업체들에도 새로운 기회로 여겨진다. 유럽은 최근 총액 8000억 유로(약 1258조원) 규모의 ‘EU 재무장계획’을 발표하고 ‘유럽 자강론’을 직접 언급하며 2030년까지 재무장을 끝내겠다는 목표다.
중동에서는 노후화된 무기를 대규모로 교체하려는 수요가 늘고 있어 한국 방산업체들의 수주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 각국이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자체 무장을 강화하면서 ‘바이 유러피안’(유럽산 구매) 전략을 추진할 계획이지만 유럽 내에서는 자체적으로 무기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가성비와 품질, 빠른 납기 등 강점을 앞세운 K방산업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장 규모만 연간 778억 달러(약 113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최정환 LS증권 애널리스트는 “유럽 재무장은 단기간 내에는 EU 자체적으로는 힘들 것”이라며 “유럽의 제조업 역량 부족이라는 산업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EU 내 서유럽 및 기타 유럽 지역 간 입장 차이로 정치적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봤다.
방산 빅4 2024년 영업이익. 그래픽=송영 기자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 등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 중인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올해 들어 세계 증시에서 방위산업 관련주가 급등했다.
각국의 방위예산 증대 움직임에 따라 미국의 군용 항공기 엔진 업체인 GE에어로스페이스의 시가총액은 올해 들어 17% 늘었고 독일의 방산업체 라인메탈은 2배 수준으로 불어났다. 전차나 함정을 만드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12%) 등 전 세계 주요 방산 기업 주가는 상승세를 타고 있다.
국내 증시에서는 한화그룹의 방산 3사(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시스템·한화오션)의 시총이 전년 대비 2∼4배가량으로 수직 상승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해 매출액 11조2462억원, 영업이익 1조7247억원을 기록, 한국 방산업체 중 처음으로 매출 11조원, 영업이익 1조원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현대로템·LIG넥스원·한국항공우주(KAI)의 합산 매출액은 22조5337억원, 영업이익은 2조 6528억원이었다. 올해는 영업이익이 3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K9 자주포.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K방산 업체들의 투자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3월 20일 이사회에서 3조 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유상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은 국내외 생산 능력 확대와 해외 관련 기업을 사들이는 데 쓰겠다고 밝혔다.
조달한 자금 중 해외 방산에 1조 6000억원, 국내 방산 9000억원, 해외 조선 8000억원, 무인기용 엔진 3000억원 규모의 금액 투자를 집행할 예정이다. 최근 유럽의 재무장 움직임 속에서 글로벌 방산 기업들도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지금이 적기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미국 주도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K방산의 성장세에는 변수가 되지 않을 전망이다.
이상현 BN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몇몇 전쟁이 종전되더라도 신냉전 돌입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과 군비 경쟁은 심화될 것으로 판단된다”며 “특히 미국의 저관여 정책은 각국의 방위비 지출 확대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종전 이후에도 세계 각국이 방위비 증액에 나서 방산·조선해양 부문의 수요가 이어질 것이란 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