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에 배송 차량이 주차돼 있다. 연합뉴스
홈플러스 측이 자사 매장을 보유한 부동산 펀드들에 임대료 조정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정을 거부할 경우 임대료 미지급이 장기화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계약 해지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임대료 수입으로 대출 이자를 상환해온 부동산 펀드들은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복수의 홈플러스 매장을 ‘세일즈앤리스백(매각 후 재임차)’ 방식으로 매입한 A부동산펀드 관계자는 23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최근 홈플러스 회계법인으로부터 임대료 조정에 응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홈플러스로부터 임대료를 받지 못하면 한두 달 내로 대출이자 연체가 불가피하다”며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홈플러스가 회생절차 연장이나 계약 해지 가능성을 언급하며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홈플러스는 지난 4일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이후 임대료 지급을 중단한 상태다. 회생 절차가 개시되면 모든 채무 변제가 중단되는데 임대료 역시 채무의 일종인 만큼 법원 승인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홈플러스는 일부 점포의 높은 임대료가 현금흐름 악화의 단초가 된 만큼 재조정을 추진하겠다는 뜻도 내비치고 있다.
문제는 임대료 미지급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회생계획안 가결은 개시일로부터 1년 이내에 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경우 최대 6개월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임대료는 회생절차에서도 동결이 되지 않는 ‘공익채권’으로 분류되지만, 홈플러스는 리스 계약을 통해 생긴 ‘금융채권’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어 다툼이 길어질 수도 있다.
홈플러스가 ‘시간 끌기’ 전략을 시사하자 부동산 펀드들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대부분의 펀드는 홈플러스 점포 매수비용의 70% 이상을 선순위 대출로 조달하고, 홈플러스에서 받는 임대료로 대출 이자를 납부한다. 만약 이자를 내지 못해 기한이익상실(EOD)이 발생하면, 대출을 제공한 은행 등 대주단이 해당 매장을 공매에 넘길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홈플러스의 임대료 인하 요구를 수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임대료가 조정되면 홈플러스 매장의 자산가치 하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대주단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금 여력이 충분한 펀드라면 계약을 해지한 후 새로운 임차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현재 상업용 부동산 시장이 극도로 경색돼 있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부동산 펀드들의 연쇄 도산이 현실화되면 금융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홈플러스가 임차해 운영 중인 66개 매장의 장부가치를 약 7조3000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중 4조원은 1금융권 대출, 1조5000억원은 2금융권 대출이다. 이는 홈플러스에 대한 카드대금채권을 유동화한 전자단기사채(ABSTB) 판매금액(6000억원)보다 9배가량 많은 규모다.
홈플러스의 회생 신청이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이번 회생이 받아들여지면 ‘경영이 어려워지면 최후의 수단으로 회생을 신청하면 된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며 “이 같은 리스크를 고려한 대주단이 앞으로 상업용 부동산 대출 금리를 올리거나 아예 대출을 내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홈플러스 측은 “임대료 지급을 위해 법원의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임대인 측에 임대료 조정을 요구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