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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근우

지난 11일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안성재 셰프는 “워라밸을 지금 지키면 미래의 워라밸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석희 역시 안씨의 말에 “200% 동의한다”고 말했다. MBC 화면 캡처


앞서 한 모든 대화는 에피타이저일뿐, 마지막 답변만이 메인디쉬로 회자되리란 걸 직감했다. 지난 3월 11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이하 <질문들>) 말미, 게스트로 나온 안성재 셰프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의 가치관 변화 속에서 요식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방청객 질문에 대해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지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지만 전문가를 양성하고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더 많은 시간을 미치광이처럼 투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답했다. 또한 논란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며 “지금의 ‘워라밸’을 지키면 미래의 ‘워라밸’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언밸런스한 삶은 미래에 더 많은 선택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의 말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자신의 답변을 보편적 삶의 궤적보단 미슐랭 가이드 3스타 파인다이닝 셰프라는 특정한 경지와 범주에 한정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국은 교육을 가장한 학대를 다룬 영화 <위플래쉬>를 보면서도 역시 스스로를 미치도록 밀어붙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얻고 감격하는 사회다.

실제로 친기업 언론인 한국경제TV는 하루 지난 3월 12일 리포트에서 <질문들>에 나온 안성재의 말을 인용해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에 한해 주 52시간 규제 예외를 적용하는 법안이 노동계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음을 비판하며 “안 셰프의 발언은 사실 경쟁이 치열한 전문가 집단에선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전문가들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사회가, 또 그런 사회에서 움직이는 기업이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시점”이라 마무리했다. 시간을 투자하고 몰입해 자신의 미적 세계를 이룬 한 인간의 경험담이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한 법적 규제를 비난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세상.

졸지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무한경쟁과 자기 착취 담론의 전파자가 된 안성재도 손석희도 <질문들>도 억울할 법하다. 하지만 그저 한국경제TV가 악의적으로 곡해했다고, 맥락맹의 억지까진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 되는 걸까. 해당 인터뷰 답변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이하 <유퀴즈>)에서 나왔다면 그럴 수도 있다. <유퀴즈>에 사회적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이젠 아무 기대가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신뢰도 1위 언론인인 손석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질문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질문들>의 프로그램 소개는 다음과 같다. ‘시대를 바꾸는 힘은 언제나 답을 가진 자가 아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지점에서 말 그대로 ‘질문’해볼 수밖에 없다. 손석희는 과연 안성재에게 어떤 제대로 된 질문을 했는가.

가령 나는 방송에서 자료 화면으로 지나간 안성재의 경력 중 미슐랭 스타를 받은 일식당에서 무급으로 요리를 시작했다는 내용을 보며, 경력과 숙련을 위한 무급 노동에 대한 안성재의 입장이 너무 궁금했다. 경쟁력을 위한 시간 투자와 몰입, 워라밸의 포기에 대한 그의 발언이 돈으로도 못 살 경험을 물려 주고픈 선량한 꼰대의 충언인지, 착취를 대물림하고 정당화하는 기득권의 간교한 요설인지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지만 <질문들>은 물 흐르듯 매끈한 진행을 통해 안성재의 독특한 인생 궤적과 인간적 매력이 드러나는 답변을 이끌어냈지만 그뿐, 무엇이 시대를 바꿀 만한 힘을 지닌 질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방송에서 밝힌 안성재의 인생과 요리에 대한 철학에선 배울 만한 게 있고, 하다못해 ‘워라밸’에 대한 소신도 자기 분야에서 특출나게 발전하고픈 이들에 한정해 좋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개인화된 미덕이 사회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담론화되는지에 대한 저널리즘적 고민과 질문이 동반되지 않을 때, 명사의 성공담은 흔한 자기개발과 공정의 서사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MZ세대(당장 이 범주부터 의심스럽고 모호하지만)가 ‘워라밸’을 요구하는 건, 단순히 윗세대와 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서가 아니라 이제 더는 노동소득으로 윗세대만큼의 자산을 형성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까지 죽어라 일을 하면 수도권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던, 혹은 그렇게 가정된 시대는 끝났다. 안성재는 미래의 ‘워라밸’을 위해 현재의 ‘워라밸’을 포기할 수 있다고 했지만, 바로 그 미래라는 것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해졌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의 라이프라도 챙기겠다는 게 ‘워라밸’의 핵심 정서다. 이것은 여유로운 삶의 태도라기보단 차라리 새로운 형태의 간절함에 가깝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안성재도 그보다도 나이가 많은 손석희도 놀라울 만큼 무지한 태도를 보인다.

당장 안성재조차 방송에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워라밸’을 위해 월세가 높은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 기업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서 영업을 했노라 고백했다. 즉 그가 기업의 지원을 받아 ‘워라밸’을 챙길 수 있던 건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되기까지 ‘워라밸’을 포기한 삶 덕이기도 하지만, 또한 아무리 그렇게 뛰어난 경지에 이르러도 노동소득으로는 월세라는 자산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를 반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경제적 성취를 오직 개인의 노력과 시간 투자에 비례한 것으로 이해할 때, 경쟁력 재고를 위해 규제를 풀고 노동시간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안성재의 발언이, 그것을 송출하면서도 딱히 비판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은 <질문들>이 한국경제TV 식의 곡해에 무력한 건 우연이 아니다.

안성재의 ‘워라밸’ 발언이 단순히 발언 자체의 임팩트를 넘어 명사 토크쇼로서 <질문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건 그래서다. 손석희와 명사 게스트가 만드는 거물 대 거물의 무게감과 별개로 이 대담은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중년 이상 기득권의 대화로 소급한다. 고담준론이 오갈 수는 있지만 서로가 공유하는 지평을 흔들만한 질문과 답이 나올 환경인지는 모르겠다. 지난 시즌에도 제기됐던 청년 세대, 사회적 소외 계층을 대변할 게스트의 부재 문제는 이번 시즌에도 반복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질문들>의 한계와 보완점을 의외의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역시 최근 화제가 된 유튜브 영상에서, 전 스켈레톤 선수 윤성빈은 본인이 부모 집에서 독립하지 못한 캥거루족이란 스태프의 고백에 “돈이 없어서냐, 막 써서냐. 일을 하는데 왜 돈이 없냐” 묻고,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하자 “생활비를 아끼면 되지 않냐”고 말했다. 안성재의 발언보다 훨씬 조심성 없고 어리석은 말이지만 해당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건 그의 말이 아니다. 캥거루족 스태프는 “최저 시급을 받으면 200~230만 원인데 집세, 관리비, 월세 하면 100만 원 나간다. 그럼 130으로 살아야 하는데, 식비랑 교통비 하면 진짜 얼마 안 남는다”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설명했고, 윤성빈은 주장을 철회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 비교하면 그 젊은 스태프가 청년 당사자로서 <질문들>의 손석희보다 대화로서 유의미한 변화와 균열을 만든 셈이다. 그가 손석희보다 뛰어난 인터뷰어나 진행자가 결코 아님에도. 그러니 정말 시대를 바꾸는 건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질문하고 누가 답할지 이미 정해진 권위의 구도 바깥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불러오느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손석희의 <유퀴즈>에 만족할 게 아니라면.

<위근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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