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9 자주포.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국내 방위산업 대장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3조6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을 지난 20일 전격 발표했다. 한국 증시 역사상 가장 큰 유증 규모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유상증자로 확보한 자금을 해외방산에 1조6000억원, 국내방산에 9000억원, 해외조선에 8000억원, 무인기용 엔진에 3000억원을 각각 투자하겠다고 했다.
유럽 방위비 증가 및 자주국방 추구, 미국 해양방산 및 조선 산업기반 강화 움직임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날 한상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IR 담당 임원(전무)은 유상증자 발표 뒤 열린 기업설명회 컨퍼런스콜에서 유상증자 배경에 대해 "지금 투자 기회를 놓치면 지금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밀려버린다는 경영진 판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한 전무는 "재무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 업황이 그렇게 녹록지 않고, 오히려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이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주주들께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이 급변할 뿐 아니라 급성장하기 때문에 투자가 기업가치 올리는 방법이라 생각한다'며 "투자가 빨리 일어나고 그 결과가 빨리 일어나면 그만큼의 주주환원을 생각 중이다"라고 말했다.
한화그룹이 인수를 추진 중인 오스탈 호주 조선소 전경. 사진=한화
한 전무는 해외 방산 투자와 관련해 "중동과 유럽에서 다양한 형태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며 "직접적인 시설 투자가 될 수도, 지분 투자 형태가 될 수도, 조인트 벤처(JV) 설립을 통한 투자도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유럽과 중동의 수요가 급성장하면서 현지화 요구도 급증하고 있다"며 "이런 트렌드를 감안하면 계획보다 빠른 투자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외조선 분야 투자에 대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외 조선소 지분 인수나 시설 투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국 함정 시장이 신조나 유지보수(MRO)나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미국이 한국 조선산업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이 시점의 투자가 적합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날 2035년 연결기준 매출 7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한 전무는 "해외매출이 국내매출을 넘어가는 시점은 5년 정도 뒤로 생각한다"며 "10년 뒤 목표인 70조원의 매출 가운데 지상방산은 30조원, 나머지 분야는 40조원이 될 것으로 보이고 40조원 중 절반은 해양방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코네티컷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미국법인(HAU) 체셔 사업장. 사진=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상 최대 규모의 유상증자 발표에 금융당국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날 금융감독원은 삼성SDI에 이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도 중점심사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경제 전체에 활력이 떨어져 있는 가운데,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이 투자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결국 공모 시장에서 조달을 할 수 있어야 기업들 자금 조달이 용이한 것"이라며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보고 있고, 최대한 빨리 심사하겠다"고 덧붙였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날 72만2000원에 정규 장을 마감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종가보다 9.97%(7만2000원) 떨어진 65만원에 거래를 마쳤다. 시간외 거래 기준 하한가(종가 대비 -10%)를 찍었다.
증권가에서는 단기적인 투자 심리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지호 메리츠증권애널리스트는 "연간 투자 목표액이 한 해에 2조원을 초과하지 않기에 연간 영업이익이 2조원을 상회하는 이익체력만으로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존재한다"며 "이른 시일 내 가시적인 성과 확인을 통한 투자심리 회복이 필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중장기 사업의 지속성 측면에서 필수적인 선제 투자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며 "수주잔고 회전율이 4년6개월 수준임을 감안하면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기인 것은 맞다"고 했다.
이동헌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증자 규모, 15% 할인으로 주주부담 가중, 지주사 한화의 불확실한 참여 여부, 편안한 성장세에서 증자를 진행한 점 등은 아쉽다"며 "중장기 성장 흐름은 유지하겠지만 단기 급락은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서재호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2년간 약 5조원의 상각전영업이익(EBITDA)가 전망되는데도 증자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주주들의 우려는 높아질 수 있다"며 "약 13%의 주주가치 희석에 따른 단기적인 주가 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여전히 견고한 지상 방산 수주 전망과 앞으로 추진될 지역·제품 믹스(배합) 다각화를 고려할 때 자본 확충에 따른 잠재적 조정을 매수 기회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