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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대신 펜 든 ‘말빛’ 이지완씨
미처 몰랐던 약자들의 삶과 고통
저마다 바라는 세상의 모습 담겨
“기억하고, 함께 나누고 싶어 기록”
지난 14일 이지완(31·활동명 말빛)씨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광장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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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침울한 소개가 되겠습니다만, 저는 가정폭력 피해자입니다. 주저앉혀지는 것이 익숙합니다. 제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휘청거릴 때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위로 돌아간 지난 1월3일, ‘익명의 청년’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주변에 설치된 한강진역 무대 위에 올랐다. ‘나약함’을 고백하며 시작한 서른살 청년의 말은, 이윽고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꾹꾹 눌러 외친 5500여 글자 속에는 광장에서 알게 된 또 다른 나약한 이들(장애인, 농민,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참사 희생자,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팔레스타인 시민)의 사연이 담겼다. “지금은 저항도, 생각도, 희망도, 사랑도, 무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로운 사람으로 혼자 있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저희의 집이 되는 날까지 지치지 말고 갑시다.” 청년은 말을 맺었다.

그날 무대에 선 청년을, ‘샤이니 응원봉’을 든 채 바라보던 이지완(31)씨는 다짐했다. “기록하자.” 그 또한 건강 문제로 휴직 중인 직장인이었다. ‘말빛’이라는 활동명으로, 크고 작은 광장의 ‘빛나는 말’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19일 윤 대통령 파면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쳐온 광장은 고비를 지나고 있다. 윤 대통령의 탄핵 선고 일정은 이날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예기치 못했던 극단적인 혐오가 넘실댄다. 12일째 단식 농성을 벌였던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진영종·정영이 공동의장은 이날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다시 민주주의’로 향하는 진통 앞에, 말빛 이지완씨와 그가 기록해온 광장의 말들을 전한다. 12·3 내란사태 이후 다양한 이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의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말들은 이씨의 선생이자 버팀목이었다. “분노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점점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싶은 마음이 커졌어요. 발언들로부터 얻는 힘으로 집회에서 밤새 버텼습니다.”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이씨가 말했다.

이씨가 소셜미디어(SNS)에 처음으로 전문을 적어 올린 지난 1월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 앞 집회 참여자의 발언. 인스타그램 갈무리

이씨는 한남동에서 청년의 말을 처음 기록한 1월3일 이후,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해고 노동자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세종호텔 집회, 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주장하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투쟁문화제, 교내 성폭력 문제를 제기했다 해임된 지혜복 교사 복직 투쟁 집회 등에 참석해 발언을 기록해왔다. 그 전문을 엑스(X·옛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올린다. 분량이 너무 길어서, 발언자들이 너무 많아서, 집회가 이곳저곳에서 수시로 열려서 언론조차 기록하지 못한 광장의 말을 모으고 있다.

작은 집회, 덜 중요하다는 사람

이씨의 하루는 12·3 내란사태 이후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 집회 참여로 시작해 ‘기록’으로 끝난다. 낮에는 투쟁 사업장 집회에 갔다가 저녁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윤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밤에는 소규모 ‘투쟁사업장 오픈 마이크’ 집회에 참석한다. 언론이 ‘대규모 집회’에 집중할 때 이씨는 더 작고 소외된 집회를 보려 한다. 그는 “광장 안에서도 위계가 존재한다. 큰 집회는 라이브 영상도 남고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지만, 소규모 집회는 그렇지 않다”며 “최대한 모든 사람의 발언을 게시하려고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대표자나 정치인보다는 투쟁 당사자나 그 안에서도 가장 소외당하는 목소리를 올린다”고 했다.

그가 기록한 작고 소외된 곳이, 실은 주무대에 가까웠다. 12·3 내란사태 이후 용기 내어 발언하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짚은 이들은 대개 취약했다. 서울 아닌 곳에서 열린 경남 통영지원 앞 거통고지회 집회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였다. 작은 집회에서 울린 김형수 지회장의 발언은 ‘차별’의 슬픔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정규직을 보며 부럽기보다는 작아지는 자신이 한스러워집니다. 노동조합 사무실 외벽에 걸린 깃발은 우리네 인생처럼 너덜너덜 해어진 채 나부낍니다. 그래도 거제도 바닷바람은 하청, 정규직 가리지 않고 차별 없이 불어옵니다.”

지난 8일 윤 대통령의 석방 소식으로 좌절감이 컸던 날엔, 여성의 날을 맞은 트랜스젠더 노동자의 발언을 기록했다. “여성의 날이 저에게 지은 죄가 참 많습니다. 저는 빵만 먹으면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빵과 장미라는 말을 알려주는 바람에 제 존엄성까지 챙겨야 하는 삶을 살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합니다. 사람답게 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이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했는데 엘리트의 말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민중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접근하기가 어려워 생생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생생한 시민의 발언 속에는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주는 민주주의 국가를 원하는 저마다의 간절함이 가득했다.

지난 14일 이씨가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파면 긴급행동 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에서 아이돌 ‘샤이니’ 응원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고나린 기자

천천히 체득하는 각자의 서사

이씨의 기록 방법은 느리다. 그는 △현장에서 직접 발언을 수집하고 △녹음을 문장으로 변환해주는 인공지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두가지 원칙을 세웠다. 집회 하나당 녹음을 듣고 받아 적는 데만 5시간 넘게 걸린다. 이씨는 “좀 더 빠르게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건 언론 몫이고 저는 발언들로부터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 몸으로 체득하려 하나하나 받아 치고 있다. 용기를 내 발언대 위에 올라간 분들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고 했다.

가르침을 준 말들은 차고 넘친다. 말의 내용을 넘어 태도와 어조 또한 배움이 된다. 지난 13일 ‘말벌 시민’(노동자 등과 연대하는 사람) 중 한명인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오픈 마이크’에서 반도체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산재 등을 상기하며 외쳤다. “살려달라는 말이 어떻게 순서를 지켜 나올 수 있습니까? 살고 싶다는 말이 어떻게 조용해질 수 있습니까?” 당면한 대통령 탄핵 앞에 다른 사회적 문제가 ‘나중에’로 밀려선 안 되는 이유를 전하는 ‘간절한 태도와 음성’은 그 자체로 울림이 됐다.

광장의 말로 깨달음을 얻는 시민은 이씨뿐이 아니다. 이씨는 “집회에 오는 사람들이 억압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미 투쟁 중인 노동자들한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다. 평범한 시민에서 지금은 준활동가가 되어 활동하고 계신 분도 있다”며 “나 역시 광장의 말들을 기록하며 그동안 몰랐던 많은 사람의 ‘자기 서사’를 알게 됐다”고 했다.

이씨는 광장의 말들이 좀 더 주목받기를 바랐다. “사회대개혁의 출발은 기존에 소외되고 주변화되고 밀려난 사람들의 서사를 인정하는 걸 넘어 주목하는 데서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밀려난 자기 서사들이 더 크게 주목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이씨는 다시 누군가의 말을 기록하려 광장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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