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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랑예의 이빈, TRT 대표 도시
중국 쓰촨성 이빈시에서 운영 중인 TRT 차량인 ART 1.0. 이빈=강갑생 기자
“우리 지하철역하고 거의 똑같네요.”
지난 7일 오전 10시쯤(현지시각) 중국 쓰촨성 이빈시의 ‘ART 이빈서역 정거장’. 일행 중 한 명이 정거장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빈의 2개 고속철도역 중 하나인 이빈서역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정거장은 ‘선로 없는 트램(TRT,Trackless Rapid Transit)’ 또는 ‘3중 굴절버스’로 불리는 신교통수단을 타는 곳이다.
지하철역처럼 먼저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나 스마트폰으로 요금을 결제하고 출입하는 방식이었다. 또 가슴 높이의 스크린도어가 설치돼 있고, 플랫폼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승하차가 가능한 ‘섬식 정거장’이어서 환승도 편리해 보였다.
정거장을 연신 오가는 차량을 얼핏 보니 겉모습은 ‘트램’과 구분이 어려웠다. 3칸(량)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길이는 30m가량 됐고, 출입문은 지하철처럼 좌·우 모두에서 열리는 ‘양문형’이었다.
차량 소개 자료를 보니 한 번에 최대 240명을 수송할 수 있다고 했다. 최대 시속은 80~100㎞로 표정속도(역 정차시간까지 포함한 평균 운행 속도)는 시속 28㎞가량이었다.
이빈의 'ART 이빈서역 정거장' 모습. 도시철도역과 흡사하다. 이빈=강갑생 기자
또 운전석이 맨 앞과 뒤 두 곳에 있어 종점이나 시점에서 차를 돌리기 위한 공간이 필요없고 운전기사가 자리만 옮기면 되는 구조였다. 차량에 올라타니 내부는 통로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좌석과 중앙에 설치된 손잡이까지 지하철 실내를 쏙 빼닮았다.
그런데 TRT 차량과 정거장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트램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차량이 달리기 위한 선로(트랙)가 따로 없었다. 또 대부분 철제바퀴인 트램과 달리 버스에서 쓰는 크기의 고무타이어를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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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타이어로 일반도로 주행
운행하는 구간 역시 일반도로였다. TRT 차량이 다니는 차로에 이중으로 점을 찍은 표시가 있었지만, 운영사 관계자는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용도로 일반페인트”라고 했다. 반면 트램은 철제바퀴든 고무바퀴든 운행을 위해선 별도의 트랙을 건설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승차감은 어떨까. ‘ART 인더스트리 파크 정거장’까지 4개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제법 흔들리거나 출렁거리는 구간이 있었다. 어떤 지점에선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차량을 함께 탄 이창운 전 한국교통연구원장은 “TRT 차량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거운 차량이 반복해서 다니면서 노면 상태가 나빠진 게 주요 원인인 것 같다”며 “승차감을 높이려면 적극적인 도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ART 내부 모습. 지하철과 비슷하다. 이빈=강갑생 기자
하지만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승객은 적지 않았다. 그만큼 TRT 시스템이 이빈에서는 중심교통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요금은 이동 거리에 따라 2위안(약 400원)~7위안(약 1400원)이었다.
원래 이빈은 중국의 유명한 술인 우량예(오량액)의 본산지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신교통수단인 TRT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활용하는 대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빈은 현재 3개의 TRT 노선을 운영 중이며, 총 길이는 92㎞다. 지선과 연장선을 포함해 길이가 24.5㎞인 1호선은 2019년 말에 개통했다. TRT를 본격 운행한 세계 최초의 노선이다. 이어 4호선(49.2㎞)은 2023년 9월, 2호선(18㎞)은 지난해 7월에 각각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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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 총 7개 TRT 노선 개통 목표
3호선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30년까지 5·6·7호선을 개통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빈의 TRT 운행 노선은 총 길이가 200㎞를 넘게 된다. 지금은 하루 평균 약 3만명이 이용하고 있다.
이빈에서 운영 중인 TRT 차량은 중국 최대 철도차량제작사인 ‘중궈중처(CRRC)’의 자회사(ITT)에서 만든 ‘ART(Autonomous Rail Rapid Transit) 1.0’이다. 정거장 이름에 ‘ART’가 붙는 이유다. 우리 말로 풀자면 ‘자율급행철도차량’정도 될 듯싶다.
현재 46편성이 이빈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 ART 1.0은 10분 충전으로 25㎞를 달릴 수 있고, 현재 개발이 완료된 ART 2.0은 더 짧아 5분 충전이면 25㎞를 주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성능을 향상시킨 ART 2.0 차량. 주저우=강갑생 기자
참고로 전 세계적으로 TRT 차량을 제작하는 회사는 ITT 외에 CRRC의 또 다른 자회사인 주저우 로코모티브(Zuzhou Locomotive)와 스위스 회사인 헤스(HESS) 등 3곳이 꼽힌다.
이 중 헤스의 차량은 운전석이 한쪽에만 있으며, 프랑스 낭트와 호주 브리즈번 등에서 운영 중이다. 주저우 로코모티브가 만든 차량인 SRT(Super Rail Rapid Transit )는 중국 장쑤성의 옌청에서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유럽 외에도 아랍에미리트,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TRT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빈이 대표적인 TRT 운영 사례로 꼽히는 이유는 비교적 많은 노선과 운행거리, 그리고 첨단 운영시스템 때문이다. ART 운영사(SDIG)에서 구축한 관제센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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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T 우선신호로 빠르게 통과
중앙에 설치된 대형모니터에는 각 차량의 위치와 운행상황이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관제센터 관계자는 “ART는 기본적으로 전용차로를 달리며, 교차로 등에서 먼저 신호를 줘서 가급적 막힘없이 운행토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ART 차로가 비어있을 때는 신호를 바꿔서 다른 일반차량도 주행할 수 있도록 한다. 도로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관제센터에서는 운전석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졸음운전 등 운전기사의 이상행동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ITT의 궈지키 본부장은 “ART 차량은 반자율 주행 기능을 활용해 주행경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복잡한 도로에서는 기사가 직접 운전하기 때문에 기사의 건강상태와 이상행동 여부를 즉각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빈의 ART 운영사가 구축한 관제센터. 이빈=강갑생 기자
ART는 노선별로 차이는 있지만, 출퇴근 시간에는 5~7.5분, 평소에는 7.5~1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이빈에서 ART가 차지하는 수송분담률은 약 10%가량으로 얘기된다.
이렇게 보면 TRT 차량은 ‘땅 위의 지하철’로 불리는 트램의 대체재 또는 경쟁상대로 제법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을 만 하다. 실제로 이빈도 처음에는 도심의 간선교통 수단으로 트램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1호선 건설에만 38억위안(약 7600억원)에 달하는 초기 투자비에 부담을 느끼던 중 TRT 개발소식을 접하고는 방향을 확 바꿨다고 한다. SDIG의 장쭝요 부총재는 “땅을 파서 별도의 선로를 만들 필요가 없는 덕에 사업비가 트램의 3분의 1 수준이면서도 수송력 면에서 별 차이가 없는 등 장점이 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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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상태따라 승차감 천차만별
승차감도 도로 관리 여하에 따라서 상당부분 개선할 수 있다. 지난 8일 오후 후난성의 주저우시에서 탑승한 ART는 이빈보다 승차감이 한결 좋았다. 궈지키 본부장은 “주저우는 ART를 도입하기 전에 도로를 먼저 정비해 승차감이 낫다”고 말했다.
굴절버스의 약점으로 꼽히는 사거리 좌회전도 예상외로 유연했다. 앞바퀴만 회전하는 기존 버스와 달리 차량의 바퀴 전체가 함께 방향이 바뀌는 첨단 기술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트램보다 훨씬 높은 오르막구간도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국내에서는 대전이 TRT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도시철도 3호선을 TRT 시스템으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미 국토교통부의 모빌리티혁신위원회에서 TRT 시범운행사업에 대해 차량 길이 제한 등과 관련한 특례도 부여받았다.
현행 자동차관리법은 굴절버스의 길이를 19m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데 TRT는 30m가 넘기 때문에 예외적용 없이는 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전은 TRT 제작업체들과의 사전 협의를 거쳐 국제입찰을 통해 연말까지 3편성을 들여와 시범운영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도시철도 2호선을 수소트램으로 결정한 대전이 3호선에는 TRT를 도입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무엇보다 뛰어난 가성비 때문이다. 김종명 대전시 철도국장은 “트램과 비교해 수송력이 엇비슷한 데다 저상이어서 교통약자 이용이 편리하고, 양문형인 덕에 승강장 운영도 유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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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이 도입 추진, 걸림돌도 많아
하지만 TRT를 본격 도입하기 위해선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우선 지하철 건설을 원하는 지역주민에 대한 설득작업이다. TRT가 신교통수단이기는 하지만 3중 굴절버스로도 불리는 탓에 조금 기다란 버스 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주민 반발이 예상외로 클 수 있다.
또 트램과 마찬가지로 도로 위에 전용차로와 정거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 차량이 다니는 차로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극심한 차량정체에 대한 반발 역시 숙제인 것이다.
다른 걸림돌은 2칸 굴절버스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다. TRT 차량은 3량 한 편성이 30억원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트램(5량 한 편성, 약 40억원)보다는 싸지만, 세종시 등에서 운행 중인 전기굴절버스(약 9억원)와 비교하면 3배나 된다.
세종시에서 운행 중인 2칸 굴절버스. 강갑생 기자
바꿔 말하면 TRT 한 편성을 살 돈이면 전기굴절버스 3대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승객(90명)은 TRT보다 적지만 배차 간격을 촘촘히 하면 오히려 더 효율적일 거란 의견도 나온다.
또 TRT를 버스로 규정할 경우 사용 연한이 애초 설계 수명(25년+5년)보다 훨씬 짧은 11년(9년+2년)을 적용받는 문제 등도 넘어야 할 걸림돌이다. 자칫 훨씬 비싼 돈을 주고 산 TRT를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폐차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용원 중부대 모빌리티공학과 교수는 “TRT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지하철 건설이 어려운 중간 규모 이상의 도시에 적합한 신교통수단”이라며 “TRT의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선 예상 문제점을 파악해 선제적으로 풀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