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의원회관 지하 1층에는 국회의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목욕탕이 있습니다.
새벽 6시 문을 여는데, 이른 아침부터 일정이 있는 의원들은 개점하자마자 종종 '오픈런'을 합니다. 얼른 씻고 빡빡한 하루 일과를 소화해야 하니까요.
여느 동네 목욕탕과 비슷하면서도, 의원 목욕탕엔 그래도 아주 조금은 특별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TV입니다.
탕 안에서, 그리고 사우나실에서 볼 수 있는 TV가 각각 1대씩 설치돼 있는 건데요.
요즘 새벽 시간 때, TV 채널을 두고 여야 의원들 간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어떤 방송국의 아침뉴스를 시청할지 문제로요.
눈치 싸움을 얼마나 하냐고요?
탄핵 정국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논의를 하는 여당의 원내대책회의에서 목욕탕 TV 채널 문제가 거론될 정도입니다. 그것도 여당의 원내대표 입에서 말이죠.
■ "MBC 채널을 바꿔놨습니다"
지난 11일 열린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
미디어특별위원회 위원장 이상휘 의원이 MBC의 윤석열 대통령 구속 취소 보도에 대해 "만나면 좋은 친구였던 MBC가 특정 세력에만 좋은 친구로 전락했다"며 편향됐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아주 날카로운 분석으로 MBC의 실체를 잘 드러냈다"며 이상휘 의원을 추켜세웠는데요.
그러면서 목욕탕 TV에 대한 자신의 에피소드를 털어놨습니다. 어떤 말을 했는지 볼까요.
[권성동/국민의힘 원내대표]
"국회의원들 목욕탕이 있는데, 과거 여야가 선호하는 방송 차이가 있기 때문에 YTN이나 연합뉴스TV를 틀어놓는 것을 묵시적인 관행으로 삼았는데, 요즘은 가보면 민주당 의원들이 많아서 그런지 맨날 MBC만 틀어놔요. 오늘 아침에도 제가 연합뉴스TV로 바꿔놨습니다. 왜 편향적 방송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국민의힘은 보도자료를 통해서도 국민의힘 '안티팬' MBC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할 정도이고, 권성동 원내대표는 취재기자에게 질문 기회를 줘놓고도, 기자가 MBC라고 소개하자마자 "다른 언론사 하세요"라며 'MBC 패싱' 논란도 일으켰죠. 당시 질문했던 기자(저는)는 '마상'을 입기도 했답니다.
때문에 권성동 원내대표의 편향성 지적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닙니다.
하지만 TV에서 MBC뉴스가 나오는데, 굳이 그걸 다른 채널로 돌렸다고 고백하는 건, 그것도 국회에 출입하는 모든 기자들이 지켜보는 원내대책회의에서 말하는 건, 새삼스럽게 서운하네요.
■ MBC 틀어 놓은 건 누굴까?
그러면 보통 오픈런을 해서 목욕탕에 MBC를 틀어 놨던 건 누구였을까요?
권성동 원내대표의 발언 3시간 뒤, 한 의원의 자수(?)로 그 정체가 바로 밝혀졌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광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맨날 MBC를 틀어 놓은 사람이 바로 접니다"라고 하면서, "누군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뒷담화하는 게 찌질하다"고 권 원내대표를 공개 저격했습니다.
■ "YTN을 '??' 하자"
권성동 원내대표가 원내대책회의에서 목욕탕 TV 사건을 이야기하자마자 당내 의원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일부 의원들은 "YTN을 '??' 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YTN 이야기는 회의가 비공개로 전환된 직후 나온 거라, 정확하게 들리지 않은 부분을 물음표 처리한 건데요.
'??'에 들어갈 단어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날의 목욕탕 상황을 이광희 의원에게 추가로 물어보니, 대략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광희 의원 목격담에 따르면, 권성동 원내대표 발언 바로 다음 날 평소 새벽 시간 때 보이지 않던 국민의힘 의원 2명이 자신보다 일찍 나와 탕에서 볼 수 있는 TV를 YTN으로 틀어놨다고 합니다.
이걸 보면, 안 들렸던 단어는 아마도 '사수'였던 거 같습니다.
과거 기사를 찾아보니, 2009년 4월 19일. 여야 의원 47명이 합심해 목욕당이 창설됐습니다.
수압 조절 위원장, 탕내 적정 온도 유지 위원장, 냉·온탕 수위 조절 위원장과 같은 당직이 있었고, 창당결의문까지 있었습니다.
[창당결의문]
"서로 비난하면서 '막말 국회', '난장판 국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이를 막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끝없는 자괴감을 금할 길이 없다. 여야가 가장 편안하게, 꾸밈없이 만날 수 있는 목욕탕에서 몇몇 선배와 후배들이 나섰다. 우리만이라도 여당은 야당을, 야당은 여당을 생각하고 인정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자"
이후 목욕당은 '호화시설 아니냐', '경제가 어려운데 탕에서 한가한 소리한다' 등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 자취를 감췄는데, 탄핵 정국 속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목욕탕 TV로도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는 현재 국회 모습을 볼 때, 창당결의문에 나온 그 취지만큼은 떠올려봄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