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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공간이 전하는 말
코펜하겐, 주민보다 자전거가 많은 곳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소박한 삶의 행복과 일상의 미학 구현

코펜하겐의 일상생활은 자전거 안장에서 시작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어릴 적 가장 가 보고 싶었던 도시, 코펜하겐(덴마크의 수도). 멀고 먼 북구의 한 도시가 내 가슴속 깊이 들어온 건 한 시절을 풍미한 추억의 보드게임 부루마블 때문이다. 주사위를 굴려 정사각형 보드 한변 중앙의 코펜하겐에 도착하면 더 화려한 도시들에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것보다 신이 났다. 네 음절 이름이 뭔가 안정감을 준 건지, 게임의 ‘도시 증서’에 적힌 소개 글이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청년기를 거치며 이 도시에 대한 동경은 계속 깊어갔다. 행복지수 세계 1위 국가 덴마크,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를 누리는 평등한 나라. 아마도 이런 제목의 신문 기사들 영향이었을 테다.

세월이 한참 흘러 코펜하겐 출장이 잡힌 어느 날의 흥분감, 지금도 또렷하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건축과 경관, 공원 문화를 조사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여정 내내 내 시선을 붙잡은 건 자전거였다. 도시를 가득 메우며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전거 행렬. 거리에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더 많았다. 최근 통계를 보면, 덴마크인 열명 중 아홉명이 자전거를 가지고 있다.

코펜하겐에는 주민보다 자전거가 더 많고, 400㎞에 이르는 자전거 도로가 있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자전거로 통근하고, 취학 아동의 25%가 자전거로 등교한다. 또 코펜하겐에서 두 자녀가 있는 가정의 25%가 화물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엔 자동차보다 자전거에 유리하도록 교통신호가 조절된다. 2012년에는 광역 자전거 고속도로 네트워크까지 구축해 도시와 도시를 자전거로 이었다. 자동차를 사면 차 가격보다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그래서 장관도 국회의원도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에는 계급이 없다.

코펜하겐 이너 하버의 자전거 전용 다리 쉬켈슬랑엔(Cykelslangen). ⓒ디싱+바이틀링

코펜하겐의 일상생활은 자전거 안장에서 시작된다. 날씨가 맑든 비가 오든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로 일터에 가고,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장을 보러 가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 편하고 빠르면서도 싸고 건강과 환경에도 좋아 자전거를 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전거가 멋있고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이유도 크다. 코펜하겐의 자전거는 편리한 친환경 교통수단을 넘어 일상의 미학적 실천이다.

영화감독이자 사진작가인 미카엘 콜빌레안데르센의 책 ‘사이클 시크’는 제목처럼 시크(chic, 멋진·세련된)하다. 얼핏 스트리트 패션 화보집 같지만 찬찬히 넘기다 보면 자전거와 함께하는 코펜하겐 라이프 스타일의 미학에 빨려든다. 책에 등장하는 라이더들은 “여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지에 어울리도록” 옷을 입고, “도시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시각적으로 일조”한다. “치마를 입고 힐을 신고 자전거로 도심을 유유히 누비는 여자, 더블 재킷에 로퍼를 신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자”가 일상이 된 도시 문화가 읽힌다.

몇 차례 더 방문하자 자전거뿐 아니라 코펜하겐의 속살도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나흘 스쳐 지나간 여행자에겐 여러 의문이 남았다. 도심에 주차장이 거의 없고 우버조차 없는 도시가 이 시대에 정말 가능한 걸까? 시민 절반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빌리티 혁명이 어떻게 성공했을까? 밀도 높은 공동주택 일색의 회색 도시 경관인데도 세련되고 여유로운 비결은 무엇일까? 산업시설이 점유했던 항구가 어떻게 시민들의 자유로운 여가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도심 한복판의 강에서 일광욕과 수영, 카약을 맘껏 즐기는 풍경은 무엇인가?

코펜하겐 하버는 여름철 휘게를 함께 누리는 ‘공동의 거실’이다. ⓒ배정한 제공

지난 연말 출간된 건축가 박희찬의 ‘관계도시’는 도시의 겉모습만 구경했던 여행자의 궁금증을 단번에 해소해주었다. 책은 코펜하겐의 도시 정체성과 매력이 다른 도시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보다는 왜 다른지 드러낸다. 저자가 찾아낸 ‘왜’의 핵심은 책 제목에 강하게 자리한 단어, ‘관계’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자 사람과 집단의 관계이며, 사람과 이념의 관계이자 사람과 도시의 관계다. 복합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의 성격을 명쾌하게 집약한 구절은 책의 부제인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일 것이다. 코펜하겐 도시성의 핵심은 “익명의 도시에서 조금은 덜 외롭고 모르는 타인과 이따금 연대하며 공동체의 삶에도 참여하는 일상의 관계”인 셈이다.

그런 관계가 도시의 일상과 주거 문화에 깊이 배어 있는데, 그 분위기를 대변하는 단어가 책 첫 챕터에 나오는 ‘휘게’(hygge)다. 휘게는 덴마크어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이라고 한다. 마이크 비킹의 책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에 따르면, 휘게는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소박한 삶의 행복”을 뜻한다. “휘게는 간소한 것, 그리고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 휘게는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분위기와 더 가깝다.” 공간의 분위기는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휘게가 덴마크 특유의 가구 디자인, 건축, 도시, 경관을 관통한다. 자전거 라이프 스타일도 휘게 문화에서 큰 지분을 차지한다.

코펜하겐 하버는 여름철 휘게를 함께 누리는 ‘공동의 거실’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코펜하겐만의 공동주택 문화와 경관은 ‘조금 덜 익명적이고 때때로 연결되는 관계’와 휘게의 도시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생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협동조합주택과 사회주택, 오랜 전통을 가진 저층형 공동주택인 레케후스(줄 지어 있는 집), 다용도 중정을 공유하는 집합주택 등에 관한 박희찬의 밀도 있는 해석이 관계도시 코펜하겐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이해하게 해준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불법 점유한 자율 도시 ‘크리스티아니아’의 존재가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거쳐 허용되었는지, 도시 확장 계획인 ‘핑거플랜’이 어떻게 도시에 자연을 제공하고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였는지, 정독해야 할 부분이 넘친다. 책에서 단 하나의 문장만 뽑으라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다면, 나의 선택은 이 문장이다. “코펜하겐 하버는 사람들이 여름철 휘게를 함께 누리는 거대한 ‘공동의 거실’이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 환경미학자이자 조경비평가인 배정한이 일상의 도시, 공간, 장소, 풍경에 얽힌 이야기를 전한다.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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