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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하기고 결정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다 잘된 거야’. 더쿱디스트리뷰션 제공

“늙고 병들면 구질구질하게 연명하지 않고 스위스로 갈 거야.”

최근 안락사·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늙고 병들면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거라는데 내 손가락을 건다’고 맞받아친다. 물론 속으로만.

존엄사의 의미나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늙고’ ‘병들고’ ‘구질구질하고’ ‘연명하는 것’에 대해 단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버튼 하나로 삶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다는 환상이 느껴져서다. 이미 수십년 동안 삶은 명쾌하지 않고 인생은 구질구질하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실천해 왔는데 어떻게 죽음만 깔끔할 수 있겠는가.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2018년 초 104살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전한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안락사, 즉 조력 사망에 대해 어느 정도 낭만적인 환상을 심어줬다. ‘제멋대로 늙어가기’(Ageing Disgracefully)라고 찍힌 티셔츠를 입고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가족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맞이하는 죽음. 누군들 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그 장면에 도달하기까지의 긴 고뇌는 짧은 기사에 담겨 있을 턱이 없으니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래픽 장은영 [email protected], 게티이미지뱅크

말기 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로 간 남유하 작가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에서는 조력 사망에 대한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자살을 준비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의 시간, 조력 사망 단체에 신청서를 내고 반려되고 다시 내고 오십번 넘게 반복하면서 겨우 받을 수 있었던 ‘그린 라이트’(조력사망 허가문서). 고민 끝에 결정한 디데이가 계속 뒤바뀔 수밖에 없었던 급박함. 서류 제출부터 비행기 표, 호텔 예약까지 엄마의 죽음에 조력해야 하는 딸의 슬픔과 그때 비가 안 왔더라면, 그때 걷지 말고 택시를 탔더라면, 다른 호텔을 잡았더라면, 마디마디 맺히는 후회. 엄마의 선택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가족과 친척들의 외면. 어디에서도 쾌적하고 깔끔한 죽음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맞이했던 엄마의 의지에 대한 지지만이 있을 뿐이다.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의료적인 조력 사망이 여전히 불법인지라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의 한 방식으로 곡기를 스스로 끊는 단식 존엄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멀게는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나온 스콧 니어링의 마지막이 그랬고,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난 존경받던 재야의 인사도 암 투병을 하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한 사실이 알려졌다. 두 인물의 면면을 보면 단식 존엄사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놀라운 결단과 의지라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이런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다고 한다. 대만의 의사가 쓴 ‘단식 존엄사’는 이를 결정한 팔순 노모의 삶과 마지막 순간까지를 딸로서, 의사로서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물론 ‘맞이하는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단식 존엄사’에서 눈길을 끄는 건 어떻게 곡기를 끊고 어떻게 육체가 죽음으로 들어가는지의 과정보다 훨씬 더 길고 포괄적인,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고통을 끝내기로 한 노모와 여기에 수긍한 저자는 가족들을 설득했고 노모는 유산을 비롯해 자신이 남긴 것들을 천천히 정리해 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마지막 정신이 흐려지기 전 온 가족이 모여 치른 생전 장례식, 즉 이별식이다. 무한한 날들이 있을 거라 믿고 오랫동안 묻지 않았으나 노모의 결정 뒤 남은 날을 헤아리며 구술 기록한 엄마(할머니)의 인생사가 펼쳐지고 당사자는 평생 침묵했던 감정을 털어놓기도 하며 함께 웃고 울면서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고인이 돼서 입관한 뒤에 장례식장에서 못다 한 말이 사무쳐 유족들이 통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이별이 아닌가.

어떻게 죽을까의 문제는 스위스냐 요양원이냐의 선택이 전부가 아니다. 긴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하며 가족의 조력은 필수고 스스로의 실천이 필요한 과정이다. 아무런 준비가 없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수 없고 우리는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것처럼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스위스 갈 돈을 모으기 전에 가족과 친구들과 죽음에 대해 더 자주 수다를 떨어보자. 죽음을 연습해 볼 수는 없으니 타인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책 읽기는 필수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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