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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톱 '국립발레단' 출신 김희현 발레리노
지난해 창단한 공공 '서울시발레단' 합류해
와 보니 정규 단원 없이 전부 프리랜서 계약
"휴일 연습엔 수당이라도 달라" 주장했지만
이견 생겨 퇴사하니 '3300만 원' 배상 청구
"K발레 위상 커져도 대우 나빠 해외로 떠나"
김희현 발레리노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재직할 당시인 2019년 참여했던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창작 발레 'Ascension: 昇天'의 무대 한 장면(왼쪽 사진)과, 지난 5일 무용수들의 처우 문제에 대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김희현씨. 김희현씨 제공·정다빈 기자


"쉽지 않겠지만 법적 대응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무용수가 이렇게 낮은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가' 하는 답답함과 분노 때문이에요. 서울시발레단은 시 지원을 받는 곳이라 공연 저작권료로 몇억 원을 주고 작품을 들여오거든요.
작품에는 그렇게 투자하면서 무용수에게
주는 돈은 아까운 건가, 휴일수당 24만 원을 못 준다고 버티는 게 말이 되나
싶었죠."

한국 최고 발레단인 국립발레단 출신의 17년 경력 발레리노 김희현(38)씨는 지난 5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 직장'인 세종문화회관을 상대로 고용노동부 진정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종문화회관은 한국 대표 문화예술기관이자, 김씨가 속했던 '서울시발레단'을 비롯해 산하 7개 서울시 예술단을 두고 있다.

그가 '24만 원'을 받아내고자 하는 이유는, 선배 발레리노로서 후배들의 앞날을 위해서이다.

"후배들을 생각하면 나쁜 관행은 바뀌고 환경 자체가 좋아져야 하는데, 국공립 발레단조차 처우가 이런 식이라면 (무용 업계가) 좋아질 수가 없어요.
국제적으로 한국 발레 위상은 올라가고
있지만 많은 무용수가 외국으로 떠나는 것도 결국 일자리가 없을뿐더러 대우가 나빠서
라고 생각해요."

국내 최고 발레단인 '국립발레단' 출신의 17년 차 김희현 발레리노가 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희현씨는 지난해 창단된 한국 3번째 공공발레단 '서울시발레단'의 창단 멤버로 무대에 올랐으나 휴일수당 미지급과 일방적인 '공연 출연료' 결정 방식 등에 항의하다가 지난해 9월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이후 발레단을 운영하는 세종문화회관은 대형 로펌을 선임해, 대체 무용수 섭외 등으로 비용이 발생했다며 그에게 3,300만 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정다빈 기자


무용수 평균 연봉 802만원, 정규직 12%뿐



김씨가 낸 고용부 진정의 핵심은
'무용수도 근로자이고, 불가피하게 휴일에 일을 시켰다면
1.5배 가산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는 것이다. 지난해 삼일절(3·1), 총선일(4·10), 광복절(8·15) 공휴일에 잡힌 총 16시간 연습 시간에 대해 연습비 3만 원을 곱한 48만 원이 지급됐는데, 휴일근로를 시켰으니 50%를 가산해 '24만 원'을 추가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씨 측은
△업무 플랫폼 '네이버웍스'를 이용해 상시 업무 지시를 받고 △기본급이 정해져
있고 △근무시간·장소가 지정돼 구속돼 있는 등 여러 사정을 볼 때 근로자가 맞다
고 주장하고 있다.

휴일수당 지급은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을 보통의 근로자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지만, '프리랜서 계약'이 만연한 무용계에서는 아직 먼 이야기다.

문화체육관광부 '2024년 예술인 실태조사(2023년 기준)' 결과, 예술인의 예술창작활동 개인 소득 평균은 연 1,055만 원이었는데, 무용(802만 원)은 그중에서도 평균치를 하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문체부 제공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무용수의 평균 연봉은 802만 원,
월 66만8,000원 수준
이었다. 외부 레슨이나 공연, 하다못해 요가나 필라테스 수업 같은 부업을 하지 않고서는 먹고살 수 없다는 뜻이다. 고용 형태도 불안정하다. 2017년 전문무용수 실태조사(전문무용수지원센터)에 따르면 고용형태는 △프리랜서 42.3% △기간제·계약직 24.8% △정규직 12.2% 등이었다.

휴일수당 보장은커녕 무급 '열정페이'도 만연하다. "춤을 좋아하지만 춤을 출 수 있는 무대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무(無)페이도 감수하고, 아르바이트를 뛰면서까지 공연을 서려는 친구들이 있죠. 그렇게 해도 생계유지가 쉽지 않으니까 결국 직업을 바꾸는 경우도 많고요."

김희현(가운데) 발레리노가 2019년 창작 발레 'Ascension: 昇天' 무대에 올랐을 당시 모습. 김희현씨 제공


'24만 원'은 국내 대표 예술기관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하고, 얼굴과 실명을 공개한 언론 인터뷰까지 응하기에는 크지 않은 금액이다. 이유를 묻자 '선배 무용수'인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무용으로만 먹고살려면 정말 힘들어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저는 이제 (발레) 학원도 운영하고 다른 것으로 먹고살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어서 목소리 낼 수 있는 거지만, 20대 초중반인 무용수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죠."

그는 국공립 발레단의 의무도 강조했다. "서울시발레단은 국공립이잖아요. 예술의 값어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매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로서, 무용수로서 최소한의 권리는 인정해 줘야 하는 거죠.
한국에 3개뿐인 국공립 발레단조차 무용수 처우가 나쁘고 그것이 기본값이 된다면,
그 아래는 더 힘들어질 겁니다.
"

만연한 초단기 계약 "쓰고 버리겠다는 것"

지난해 2월 20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발레단 창단 기자 간담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왼쪽 네 번째)과 2024 첫 시즌 무용수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장 오른쪽이 김희현 발레리노이다. 서울시 제공


김씨는 무용계 '대기업'으로 꼽히는 국립발레단에서 발레리노 커리어를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22년까지 국립발레단 정단원으로 있다가, 잠시 프리랜서 활동 후 지난해 2월 창단한 '서울시발레단' 초기 멤버로 합류했다. 국립·광주시립에 이은 국내 3번째 공공 발레단이자, 국내 유일의 공공 컨템퍼러리(현대) 발레단이다.

그러나 서울시발레단의
빛나는 수식어 뒤에는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이라는 'K예술계의 그림자'
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는 게 김씨의 경험담이다. 근로계약서를 쓴 정단원 무용수가 60~70%는 되고 각종 수당 역시 당연히 보장되던 국립발레단 시절과 달리,
서울시발레단은 같은 공공임
에도 전부 비정규직 무용수에 임금 지급 방식도 체계가 없었다는 것
이다.

우선 정규직이 전무했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주요 역할 담당) 출신인 김씨도 '프리랜서 계약'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근로계약서 대신 '출연 용역 계약서'를 쓴 것이다. 그마저도 계약이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이었던 그는 사정이 좋은 경우였다.
김씨 같은 '시즌 단원'은 5명뿐이었
고, 나머지 80% 이상 무용수는
각 공연별로 수개월 단기 계약을 반복하는
'프로젝트 단원'
이었다.

"처음 계약서를 받을 때부터 '용역 계약서'라는 표현에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너희는 그냥 1년짜리 쓰고 마는 대상이고, 노조도 만들 수 없고, 하는 만큼 하고 나가라'라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서울시발레단은 상주 단원을 두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단장과 정년 단원 중심의 '경직된 시스템'을 벗어나 유연한 운영을 하려는 취지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고용 안정성 측면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제도 악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무용 평론가는 "프리랜서 계약을 한다면 그나마 나은 게
문체부가 권장하는 표준계약서(공연예술출연계약서)
인데
'용역 계약서'
라면
개중에서도 최악
"이라며
"(무용수를)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나이가 차면 쳐다도 안 보겠다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

김희현 발레리노가 5일 '전 직장'인 세종문화회관을 상대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제기한 근로기준법 위반 진정서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김씨 측은 "형식상 용역 계약이었다는 이유로 발레 무용수의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선례가 남으면 발레단은 이러한 맹점을 계속 이용하고, 발레 무용수들은 근로자로서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일례로 계약서에는
'무용수의 작업이 회사와 합의된 제작 의도 및 진행 방향에 부합하지 않을 때 회사는 별도의 최고(催告·통지) 없이 본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는 내용도 있다. 김씨를 대리하는 김민호 변호사(VIP법률사무소)는 "사실상 세종문화회관 측의 주관적 의사에 따라, 회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의미"라며 "계약서 면면을 보면 프리랜서로서 가진 불리한 측면과 근로자로서 가진 불리한 측면이 모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공연 수당 표 있는 국립발레단, 직전 통보하는 서울시발레단

김희현(왼쪽) 발레리노와 대리인 김민호 변호사가 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임금 책정 방식도 문제가 있었다는 게 김씨 측 주장이다.

김씨의 기본 출연료는 10개월에 1,000만 원이었다. 월 100만 원인 셈이다. 기본 출연료 외에는 시간당 3만 원 연습비와 공연 출연료가 있다. 2월 중순부터 9월 퇴사 전까지 김씨가 받은 실수령 총액은 2,846만 원으로
월 300만 원 후반에서 400만 원 초반 수준
이다. 업계 평균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액수지만 최고 수준의 17년 경력 발레리노인 점을 감안하면, 무용계 현실을 알 수 있다.

김씨는 공휴일 연습 일정을 일방적으로 정해 통보하고, 휴일근로에 대한 추가 수당을 주지 않는 것 역시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연습 시간 결정도 협의 없이 통보식이었어요.
공휴일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그날 연습 잡겠다'고 말하면 끝
이었고요. 아무리 창단 초기라 해도, 체계는 없고 강제성만 있는 상황이었죠. 발레단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누군가는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데, 20대 초중반의 젊은 무용수가 대부분이다 보니 얘기할 사람이 저 말고 별로 없더라고요."

김씨는 여러 차례 불가피하게 공휴일에 연습을 잡는다면 통상 연습비의 50%라도 가산해 추가 지급할 것을 요구했으나, 회사 측은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이 적용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올해 1월 21일 서울 용산구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스튜디오에서 열린 2025 세종시즌 사업발표회에서 세종문화회관 운영 성과 등을 소개하고 있다. 국내 3번째 공공 발레단으로 지난해 2월 창단한 서울시발레단은, 여타 공공예술단과 달리 단장과 정년 보장(정규직) 단원이 없고 매해 '시즌 무용수'를 새로 선발해 객원 무용수들과 함께 공연을 올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뉴스1


공연 출연료도 일방통행식이었다. 2월 처음 계약할 당시 구두로 협의한 내용도 없이, 공연 올리기 직전에서야 "이번 공연은 회당 출연료가 얼마로 결정됐다"고 고지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4월 첫 번째 공연 때 회당 60만 원(3회), 8월 두 번째 공연 때는 회당 100만 원(3회)을 받았다. 그런데 10월 세 번째 공연을 앞두고서는 갑자기 회당 40만 원(6회)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
국립발레단에는 주역, 솔리스트, 꼬르 드(군무) 역할마다 공연 수당이 얼마인지 투명하게
공개돼 있는 표가 있고 5년 이상 연차가 쌓이면 수당이 조금 오르기도 해요. 좋은 선례가 이미 있는
거죠
. 최소한 민간단체와 프리랜서 계약을 할 때도 구두 계약이지만 1회당 얼마를 주겠다 언질은 주고 시작하고요. 그런데 세종문화회관은 공연 직전에 다 와가지고 '주는 대로 받으라'는 식인 거예요."

휴일근로수당과 공연 출연료 등 임금 관련 양측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김씨는 지난해 9월 25일 사직서를 내고 서울시발레단을 나왔다. 9월 동안 일한 노동력에 대한 임금 125만 원(일할 계산한 기본 출연료 80만 원·연습비 45만 원)은 아직까지 받지 못한 상태다.

"형식상 프리랜서여도 근로자성 지켜져야"

김희현(왼쪽) 발레리노가 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회의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민호 변호사이다. 정다빈 기자


지난해 연말, 세종문화회관은 대형 로펌을 선임해 김씨에게
'참가 의무가 있는 교육·연습·공연
등에 무단 불참해 회사가 3,300만 원 손해를 봤다'며 배상을 청구하는 소장
을 보냈다. 피해 금액에는 김씨 후임으로 뽑힌, 해외 체류 중이었던 대체 무용수의 항공료·숙박비, 김씨가 '무급'으로 촬영에 임했던 홍보 촬영비와 촬영 당시 간식비·소품비 등이 전부 포함됐다.

"소장 받고 일주일 정도는 저도 마음이 힘들더라고요.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소송 건 게 너무 눈에 보이는 거예요. 업계 내에 부당한 일이 있어도 '너네 선배 소송 걸린 거 못 봤냐' 말하면, 문제 제기 하는 게 더 어려워지는 거죠.
휴일수당 24만 원도 어찌 보면 크지 않은 금액을 가지고 버틴
건데, 그걸 주면 이제 다른 사람도 계속 줘야 한다는 선례가 남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김희현 발레리노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로 재직할 당시인 지난 2019년 참여한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창작 발레 'Ascension: 昇天'의 무대 한 장면. 김희현씨 제공


'미지급된 휴일수당과 9월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고용청 진정이 받아들여질지는
김씨에
대한 '근로자성 인정' 여부
에 달렸다. 오랫동안 예술인의 근로자성은 인정되지 못했으나, 법원은 점차 뮤지컬 앙상블 배우나 판소리 단원 등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외견상 계약 형태와 무관하게 실질적 업무 내용을 살펴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추세다.

김민호 변호사는 이 사건이 근로자성 인정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체 무용수들의 계약 방식 자체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법원도 점차 형식적 계약 형태와 무관하게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추세로 가고 있어요. 워낙 많은 기업들이 용역과 프리랜서 계약으로 노동관계법 적용을 회피하는 편법을 쓰니까요.
용역 계약을 체결했어도 근로자로서 최소한 보호는 당연히 받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계약 형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어렵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왔을 때, 부당한 관행과 처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국립발레단이라는 국공립 선배 모델도 있으니 시가 의지만 있으면 개선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체계를 갖춘 기관을 롤 모델로 벤치마킹했으면 좋겠어요."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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