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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 정문을 통과하기 직전, 경호 차량에서 내린 그는 34걸음을 걸어 내려온 뒤 90도 가까이 세 번 고개를 숙였다. 이후 32걸음을 걷고 두 번, 다시 48걸음을 걷고는 두 번 또 고개 숙였다. 경호차량에 다시 탈 때까지 2분 54초간 11번이나 인사했다. 손을 흔들거나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가끔 표정은 상기됐고, 눈가가 촉촉하기도 했다. 이처럼 현직 대통령으로 헌정 사상 처음 구속기소됐던 윤석열 대통령은 구속 52일만인 8일 오후 5시 48분 석방됐다. 처음 대중 앞에 공개한 모습은 지지층을 향한 격한 감사함의 표시로, 사실상의 ‘정치 재개’ 선언이었다.

법원의 구속취소 청구 인용으로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지난 1월 26일 구속기소 된 지 41일 만, 1월 15일 체포된 후 52일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뉴스1
이에 대해 여권 고위 관계자는 9일 “윤 대통령이 구치소 정문에서 내려 차에 올라타기까지의 행진 같은 걸음이 많은 것을 상징한다. 윤 대통령 석방은 방어권 보장이나 국격 등에서는 다행이지만, 우리 입장에선 딜레마이기도 하다”고 토로했다.

윤 대통령이 ‘일단’ 돌아왔다. 일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건, 형법상 내란죄에 대한 유ㆍ무죄는 여전히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 선고도 눈앞에 다가와있다. 대통령 직(職)은 유지하나, 대통령 권한은 정지된 상태다. 쉽게 말해 1월 15일 체포되기 전까지 한남동 관저에서 머물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이다.

다만 52일간의 구속 기간 윤 대통령의 정치적 덩치는 커졌다. 최근 여론 흐름은 지난해 12·3 계엄 직후 지지율(한국갤럽 조사 11%, 지난해 12월 둘째 주)과 판이하다. 50%에 육박하는 일부 여론조사 업체의 신뢰성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보수가 결집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익명을 원한 주요 여론조사업체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체포ㆍ구속되는 과정에서 약자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며 “야권의 오버 페이스가 보수층의 반발심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정치적 힘은 광장에서도 가시화됐다. 탄핵반대 집회가 정점을 이뤘던 3ㆍ1절 집회 때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 12만 명(경찰 비공식 추산)이 운집했던 게 대표적이다. 두 집회는 전광훈 목사와 개신교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주최했다. 윤 대통령은 구치소에서 나오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응원을 보내주신 많은 국민들, 우리 미래 세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는 메시지를 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현안 관련 기자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석방과 함께 보수진영 내 윤 대통령 구심력은 더 강화되는 모양새다. 당장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을 구속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현재 탄핵 심판중인 헌법재판소를 향해 날선 반응을 쏟아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법원이 내란죄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가 수사한 게 위법하다고 했으니, 헌재가 이번 결정을 참고해 변론 재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헌재, 공수처는 폐지해야 한다”(홍준표 대구시장), “협박과 조작으로 점철된 내란공작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나경원 의원) 등의 주장도 나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찬대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9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내란 검찰 규탄한다’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그러나 여권의 속내는 복잡하다. “기세를 탔다”며 이번 윤 대통령의 석방이 헌재의 탄핵 기각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지만, “탄핵이 인용될 경우엔 ‘자연인 윤석열’이 더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근 찬반 여론이 불리하다는 건 여권으로선 부담스러운 지점이다. 한국갤럽 정례조사 기준으로 ‘찬성 75% vs 반대 21%(지난해 12월 2주) → 64% vs 32%(1월 2주) → 57% vs 38%(2월 2주) → 60% vs 35%(3월 1주)’의 조사결과였다. 계엄 초기의 최악의 상황은 간신히 벗어났지만, 2월 이후 20%포인트 가량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조기 대선에서 캐스팅보트가 될 중도층의 경우 3월 1주 조사에서 탄핵 찬성 71%, 반대 22%였다. 결국 조기 대선이 성사되면 국민의힘으로선 탄핵 반대에서 대선 레이스로의 유턴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묵 한국외대(정치학) 교수는 “조기 대선이 열리면 국민의힘 후보들은 풀려난 윤 대통령과 절연은 커녕, 낙점을 받아야 당내 경선을 통과할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심우정 검찰총장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강공 모드로 전환했다. 윤 대통령 석방이 헌재의 탄핵 선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이 때문에 여야 대립의 격화가 불가피해진 가운데 이 대표가 공들여온 우클릭 행보에 탄력이 붙기 어렵게 됐다.

다만 이같은 분위기가 당장엔 득이 될 거라는 관측이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윤석열의 재등장으로 느슨했던 야권이 다시 결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민주당 지도부에 속한 의원은 “최근 당내 경선 방식을 두고 이견이 적지 않았고, 이 대표의 ‘비명-검찰 내통’ 발언으로 시끄러웠는데, 윤석열 덕분에 다 사그라졌다”며 “조기 대선이 ‘윤석열 아바타 대 이재명’ 구도가 되면 당연히 우리가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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