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넘는 과학자들] 김갑진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
김갑진 카이스트(KAIST) 물리학과 교수가 지난달 20일 대전시 유성구 카이스트 본원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물리학회 대중화위원회 실무 이사 직책을 맡은 김 교수는 대중이 물리를 좀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고 있다고 밝혔다. 대전=권현구 기자
올해는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으로 유엔(UN)이 정한 ‘세계 양자 과학기술의 해’다. 각국 정부와 기업은 10년 이내에 고성능 양자컴퓨터·양자통신 등 양자기술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도 양자 분야를 인공지능(AI)·반도체, 첨단바이오와 더불어 3대 게임체인저 기술로 지정해 양자컴퓨터 패권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양자기술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지식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유튜브에도 양자역학 강의가 쏟아진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은 역설적으로 ‘양자역학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김갑진 카이스트(KAIST) 교수의 강의다.
김 교수는 양자역학은 몰라도 되지만 과학은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AI 시대가 도래했지만 AI에 질문하는 법은 과학을 통해 탐구하고 관찰해야 기를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대전시 유성구 카이스트 본원에서 만난 김 교수는 “정해진 답을 찾는 교육 대신 질문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육이 필요한 시대에 과학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물리학회 대중화위원회 실무 이사를 맡고 있다. 물리학을 포함한 대부분 기초학문이 고사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해당 직책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국의 엘리트주의가 기초학문 발전을 저지하는 배경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학부모의 편견이 학생들이 기초학문 연구의 길로 가는 걸 막는다고 봤다.
김갑진 카이스트(KAIST) 물리학과 교수는 양자컴퓨터 개발과 관련해 정부가 획일적인 목표를 제시하기보다는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전=권현구 기자
김 교수는 “한국은 어느 분야든 최고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엘리트주의가 심하다”면서 “물리는 전교 1등만 할 수 있는 학문이라며 학생들의 전공을 제한하는 부모의 강요도 문제”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일본 유학 시절을 돌이키며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일본의 사회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일본 대학생들은 손바닥만 한 얇은 전공 책 하나만 공부하기 때문에 기초학문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없고, 학사 과정을 따라가지 못해 포기하는 학생은 드물다고 말했다. 기초학문 연구자를 국가가 지원해주는 사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도 부연했다. 그는 “일본은 국가가 대학원생 월급의 많은 부분을 책임진다”면서 “교수가 되기 위해 큰 비용을 들여 유학을 떠나는 걸 불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유학이 필수가 아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실무 이사직을 맡은 뒤 유튜브 콘텐츠에 자주 얼굴을 내비쳤다. 일부 교수들은 잦은 미디어 출현이 연구에 방해가 된다며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김 교수는 개의치 않았다.
김 교수는 “대중이 생각하는 물리는 빅뱅, 블랙홀 정도의 범위에 갇혀 있는데 이를 깨고 싶었다”면서 “어렵고 대단한 게 아니라 책상, 의자 같은 일상 속 모든 것이 물리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최근 양자컴퓨터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현상도 긍정적으로 봤다. 이런 계기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물리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궁극적으로는 과학을 공부하게 되고, 마침내 질문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양자역학에 대해 ‘세상은 연속적이지 않다고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1 다음에 1.5가 있고 그다음에 2가 있는 연속의 상태를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은 중간 단계 없이 1 다음에 바로 2로 넘어가 버리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당구장에서 게임을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하면 화면을 보면서 공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공이 어느 곳으로 갈지 계산할 수 없고, 모든 공간에 확률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세계는 양자역학에 뛰어들까. 김 교수는 양자역학을 기본 원리로 하는 양자컴퓨터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자컴퓨터는 경우의 수가 수천만개에 이르는 복잡하고 난해한 과제의 답을 내리는 데 특화돼 있다.
예를 들어 분자들을 조합하는 시뮬레이션을 무한으로 돌려 기후 위기, 식량 문제, 전염병 등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전염병의 백신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분자와 분자 간 결합 실험을 양자컴퓨터로 계산하면 인체 실험 없이 백신 제조법을 도출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양자역학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창의적인 지원 방법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재 한국은 미국의 양자기술을 모방하는 수준으로 미국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절대 미국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는 “미국이 A라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면 조금 늦어지더라도 한국은 B라는 방식으로 도전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쾌활한 목소리와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양자역학 ‘일타강사’ 타이틀을 얻은 김 교수는 동료 교수들이 넘지 않은 선을 넘으며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다. 김 교수의 영원한 목표는 ‘남과 다른 과학자’다. 그는 “교수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반감이 들어 그 반대의 길만 걸었다”면서 “앞으로도 남과 다른 연구를 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