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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업가 정길씨가 지난해 1월 대한적십자사 서울남부혈액원에서 헌혈 정년(69세)이 되자 마지막 헌혈을 하고 있다. 정씨는 ″아직 생생한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항변한다. 정씨는 27년 간 200번 넘게 헌혈했다. 사진 대한적십자사
개인 사업을 하는 정길(71·서울 강남구)씨는 지난해 1월 '헌혈 정년'이 됐다. 만 70세가 되기 직전 그달 8일 마지막 헌혈을 했다. 1997년 첫 현혈 후 27년 동안 200번 넘게 했다.

정씨는 지금도 기분이 안 좋다. 그는 "아주 생생하고 괜찮은데, 아직 쓸만한데 나이 많다고 무조건 (헌혈을) 그만두게 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정씨는 "근로 정년은 젊은이에게 기회를 주니까 의미 있지만, 헌혈 정년이라니. 의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모를까 전혀 아닌데…"라고 아쉬워한다.

200번 해오다 헌혈 정년 걸려 정씨는 97년 어머니가 위암 치료 중 수혈을 받는 걸 보고 헌혈에 나서게 됐다. 헌혈을 시작하고 나서 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전에 술·담배를 조금 했는데 큰맘 먹고 끊어버렸다. 적십자 혈액원이 제공하는 여러 종류의 건강 데이터가 도움됐다.

헌혈 상한 연령 69세 논란
건강 달라졌는데 16년째 유지
저출산·고령화로 수급난 심화
"상한 폐지,의사 진단 후 허용"
혈소판 헌혈이 거부된 적이 있는데, 혈액에 기름기가 많아서 그랬다고 한다. 이후 정씨는 기름진 음식을 멀리했다.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그랬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금 약을 하나도 안 먹는다고 한다.

현행 혈액관리법 시행규칙은 헌혈할 수 있는 상한 연령을 69세로 규정한다. 70세 이상은 금지다. 기부자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다. 헌혈 금지 연령은 2009년 65세에서 70세로 올렸다. 65~69세에 하려면 60~64세에 헌혈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 제한했다.

그새 16년 흘렀다. 한국인의 건강 상태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우선 기대수명이 2009년 76세에서 83.5세(2023년)로 올랐다. 게다가 요즘 70세는 옛날 70세와 다르다. 노년의학 전문가들은 신체 연령이 10년 넘게 젊어졌다고 본다. 정길씨는 "몸은 50대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에는 항의가 잇따른다.
차미경 씨(61)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강서구 발산 헌혈의 집에서 헌혈하고 있다. 차씨는 “(현혈을 통해) 남을 도우려는 목적도 있지만 내 건강을 확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건강 관리를 잘해서 그동안 100번 넘게 꾸준히 헌혈해 왔는데, 나이를 들어 못하게 하니 아쉽네요. 헌혈할 때마다 건강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상황이니 나이 제한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70대의 항변이다. 다른 70대는 "건강 상태를 확인해서 문제가 없으면 할 수 있게 해 달라" 고 호소한다. 이들은 "혈액이 부족할 때가 많다면서 왜 막느냐"고 수급 사정까지 파고든다.

혈액은 자급자족이 원칙이며 외국에서 들여오지 않는다. 대한적십자사 중앙혈액원 채성 팀장은 "저출산·고령화가 혈액 수급 환경에 기하급수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학생이나 학급수가 급감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출산으로 헌혈할 사람은 줄고, 노인이 늘면서 수혈받을 사람은 급증한다.

작년 혈액 비상 62일 발생
박경민 기자
국내 헌혈은 지난해 285만 5540건이다. 2015년 308만건으로 정점에 달했다가 계속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저출산의 영향을 보자. 지난해 헌혈의 55.7%(적십자 헌혈 기준)가 10,20대 학생과 군인이 담당했다. 10년 전만 해도 70% 넘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헌혈은 한 번이라도 경험한 게 중요한데, 코로나19 때 거리 두기 때문에 학생들이 경험할 기회가 대폭 줄었다.

게다가 대학 입시의 봉사 점수 가점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다 보니 항상 간당간당한다. 혈액 적정 재고는 최소 5일 치. 지난해 이 밑으로 떨어져서 비상 걸린 날이 62일이다. 지난해 2월 15, 16일은 4일 치만 남기도 했다.

2050년 헌혈 46% ↓,수혈 39% ↑ 앞으로 더 문제다. 김오석(지리학) 고려대 교수팀이 지난해 5월 국제학술지 '대한의학회지(JKMS)'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아찔할 정도다. 김 교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데이터와 인구 자료를 사용해 2050년까지 혈액 수급을 추정했다. 그 결과 헌혈은 2021년 약 260만 단위에서 2050년 약 140만 단위로 46% 감소한다.

반면 수요는 2021년 상승하여 2045년 510만 단위로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한다. 전체적으로 39.1% 증가한다. 특히 70,80대 고령층 수요가 많이 증가한다. 지역별로는 경기도의 혈액 부족이 제일 문제다.

김 교수는 "혈액은 수입할 수 없어 (수급을 맞추기) 어렵다"며 "선진국일수록 연령 제한이 없다. 우리도 70세 제한을 풀되 의사가 헌혈해도 된다고 진단한 경우로 조건을 붙이자"고 말한다. 21대 국회에 이런 내용의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70대 헌혈이 문제는 없을까.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본인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70대 헌혈 금지는 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수혈받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며 "헌혈 후 어지럼증이 생겨 넘어지는 문제를 관리한다면 연령 제한을 풀어도 된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의사가 헌혈해도 된다고 진단한 사람에 한해 허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김오석 교수는 "중년 시기부터 운동을 열심히 해서 70대 넘어 수혈받을 일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령제한 과학적 근거 없다"
박경민 기자
벨기에는 2018년 연령 제한(71세)을 없앴다. 제한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봤다. 그 이후 연 1만5000건가량 헌혈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도 연령을 풀면 이 정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캐나다·독일·호주·싱가포르는 연령 상한이 없다. 호주는 첫 헌혈은 76세까지 가능하다. 81세부터는 지난 5년 호주 내 헌혈 경험이 있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66세 이상은 최근 3년 내 헌혈 경력이 있거나 의사 승인이 필요하다. 반면 세계보건기구(WHO)는 65세 상한을 권고한다. 뉴질랜드 81세, 홍콩 75세, 프랑스는 70세, 일본 69세, 중국 60세로 상한을 둔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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