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국영TV, 3년만에 시상식 보도…'문화적 위상 정상화' 자평
우크라 영화감독 "영화 속 전쟁 언급 전무" 불편한 감정 토로
우크라 영화감독 "영화 속 전쟁 언급 전무" 불편한 감정 토로
오스카상 5관왕에 오른 '아노라' 출연진과 감독. 오른쪽부터 유라 보리소프, 마크 에이델슈테인, 숀 베이커 감독, 마이키 매디슨. [로이터=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영화 '아노라'가 올해 아카데미(오스카상) 시상식을 휩쓴 것을 두고, 총구를 맞대고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도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고 있다.
3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 TV는 이날 아노라가 오스카상 5관왕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전했다.
러시아 국영방송이 오스카상 시상식을 보도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이다.
아노라에 출연한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가 올해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보리소프의 수상은 불발됐지만,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무대에서 그의 재능을 칭찬한 것까지 방송은 소상히 소개했다.
아노라는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한 뉴욕의 스트리퍼가 시부모로부터 결혼 생활을 위협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러시아를 미화하거나 편드는 내용이라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시상식 진행자 코넌 오브라이언은 아노라의 선전에 "강한 러시아인에 맞서는 장면을 마침내 본 미국인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다"고 비꼬기도 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고립에서 벗어나 문화적 위상이 '정상화'되고 있다는 자긍심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집권 이후 종전 협상이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의 친정부 성향 평론가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텔레그램에서 "러시아 문화는 취소될 수 없다. 러시아도 취소될 수 없다"며 "조만간 서방은 러시아와 타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화 '아노라'에 출연한 유리 보리소프(왼쪽부터), 마이키 매디슨, 마크 에이델슈테인 [AFP=연합뉴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과 그 지지자들은 아노라의 성공에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전쟁보다 훨씬 앞선 팬데믹 이전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는 이 영화가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을 현실에서 지우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다.
우크라이나 영화 제작자 올렉산드르 로드냔스키는 인스타그램에 "이 영화에서 전쟁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며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적었다.
보리소프가 러시아에서 일련의 '애국주의 영화'에 출연했던 이력도 박수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호원 역할을 맡은 보리소프나 재벌 2세 역할을 맡은 마크 에이델슈테인 등 러시아 배우들은 한 번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반대하지도 않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기에 이들이 러시아와 서방을 오가며 자유로운 연기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화평론가 예카테리나 바라바시가 최대 징역 10년이 가능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체포된 것이 불과 지난주라고 꼬집었다.
라트비아계 미국인 소설가인 마이클 이도우는 뉴욕타임스(NYT)에 "보리소프와 에이델슈타인은 할리우드의 포용 덕분에 위험 없이 금의환향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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