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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제조책 헝가리인 마자르, 의열단 해체 뒤 행적 묘연
아일랜드인 조지 쇼, 김구 선생 피신 돕다 일본 경찰에 체포
‘34번째 민족 대표’라 불린 프랭크 스코필드 교수(오른쪽)와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통역이었던 목원홍. 부키 제공

단재 신채호가 1923년 1월에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은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라며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한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된다. 이 문건은 항일 무장투쟁 단체 의열단의 지도자인 약산 김원봉의 의뢰로 쓴 것인데, 이렇듯 폭력 사용을 강조한 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마자르’라는 이름으로 불린 헝가리인 폭탄 전문가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몽골에서 활동한 의사 겸 독립운동가 이태준을 거쳐 김원봉과 연결된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량으로 폭탄을 제조했고, 의열단은 이 폭탄들을 국내로 들여와 작전을 펼치려다가 밀정의 밀고로 무위에 그쳤다. 영화 ‘밀정’에 나오는 헝가리 출신 아나키스트 루비크가 마자르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06주년 3·1절을 앞두고 나온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입니다’는 한국의 독립 투쟁에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선 ‘대한외국인’들의 존재에 주목한 책이다. 2024년 11월 현재 서훈을 받은 독립 유공자는 1만8162명이고 이 가운데 외국인이 95명인데, 재외동포를 제한 ‘순수’ 외국인은 76명이다. 그러나 마자르는 이 76명에 들어 있지 않다. 1924년 의열단이 사실상 해체된 뒤 행적이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외국인 독립운동가 25명 가운데에는 유명한 이들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예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이들도 여럿이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입니다 l 강국진·김승훈·한종수 지음, 부키, 2만2000원

3·1운동 직후 김구가 조선을 떠나 상하이로 향할 때 이용한 배편은 중국 단둥의 무역회사 겸 선박 대리점 이륭양행 소유였다. “황해안을 지날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정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인 함장은 들은 체도 않고 전속력으로 경비 구역을 지나갔”으며 그 결과 일행은 무사히 상하이 황푸 선창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김구는 ‘백범일지’에 썼다. 김구가 말한 영국인 선장은 사실은 아일랜드인인 이륭양행 사장 조지 쇼였고, 마자르가 제조한 폭탄을 국내로 실어 나른 배 역시 이륭양행 소유 기선이었다. 영국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린 아일랜드 출신인 쇼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내란죄로 복역하기까지 했다.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앞줄 가운데)을 찾아간 미국인 조지 피치 목사와 부인 제럴딘 피치(앞줄 오른쪽). 김구 선생 왼쪽은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피치 목사 부부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뒤 일본 군경에 쫓긴 김구 선생을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자신들 집에 숨겨 주었다가 자싱으로 김구 선생을 피신시켰다. 부키 제공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육군 대장 등 주요 인사들 여럿이 죽거나 다친 뒤 김구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미국인 조지 피치 목사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숨어 지냈다. 이후 피치 부부는 그를 차에 태워 자싱으로 피신시켰다. 중국인 리수전(한국 이름 이숙진)은 임시정부 요인 조성환과 결혼한 뒤 한국혁명여성동맹 소속으로 활동을 벌이다가 해방 뒤 한국으로 들어왔다. 역시 중국 여성인 두쥔훼이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꼽은 ‘붉은 승려’ 김성숙과 결혼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 소속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항일 의병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무리 장면에서 재연되어 화제를 모은 그 사진은 의병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는 유일하다. 에이피(AP) 통신의 특별통신원으로 1919년 3월3일 서울에 도착해 나흘 동안 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시위 현장을 취재했으며 3·1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본을 미국으로 가져가 세계에 알린 밸런타인 매클래치, 광산업자이면서 독립선언서 사본과 그에 관해 자신이 쓴 기사를 반출해 뉴욕타임스에 보도되도록 한 ‘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테일러, 테일러와 함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외국에 알린 ‘34번째 민족 대표’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등의 활동도 감동적이다.

영국 신문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매켄지가 경기도 양평 인근에서 인터뷰하고 촬영한 항일 의병들의 모습. 부키 제공

일본인으로서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이는 두 사람으로,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가네코 부부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그들이다. 후세는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인 유학생 9명을 무료 변론했고 전남 나주 농민들이 동양척식회사를 상대로 벌인 토지 반환 투쟁을 도왔으며 조선공산당 사건 변호를 맡는 등의 활동으로 ‘조선 프롤레타리아의 벗’으로 불렸다. 이밖에도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에서 노조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9년을 복역한 이소가야 스에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숨겨주었다가 투옥되고 실직한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 교원노조 조선지부 결성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죠코 요네타로 등 서훈을 받지 못한 일본인들도 여럿이다. 흥남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이소가야가 조선인 특고(특별고등경찰) 김세만에게 악독한 고문을 당하는 대목은 친일과 반일, 애국심과 인류애를 둘러싼 착잡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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