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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경 '돌봄이 이끄는 자리'
의료진이 4일 태국 북부 타송양의 한 병원에서 인근 난민 캠프에서 이송돼 온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타송양=로이터 연합뉴스


'한국은 의료 선진국이다.'

1989년 국민건강보험 도입 이후 쌓아온 한국 의료 명성에 금이 가고 있다. 아픈 아이를 진료해줄 곳이 부족해 소아과마다 오픈런이 일상이고, 응급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른다. 지방 소도시에서는 산부인과가 없어 출산을 위해 수십㎞를 오가는 일이 빈번하다. 지역 필수 의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정부가 추진한 의대 증원 사태는 오히려 의정 갈등만 촉발했다. 작금의 사태는 한국이 과연 의료 선진국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신간 '돌봄이 이끄는 자리'에서 태국의 한 공공병원으로 독자를 이끈다. 책에는 태국 치앙마이의 반팻 병원에서 2010~2012년 현장 연구를 진행하며 경험한 태국의 의료 현장이 생생히 담겼다. 태국은 2002년 의료개혁을 단행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건강보험을 도입했고, 공공병원을 중심으로 짜인 의료체계의 공공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서 교수는 "한국에선 공공병원을 가난한 사람들 가는 곳이나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위기가 있을 때 대응하는 곳으로만 생각하는데, 태국의 사례를 통해 공공병원이 일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어로 쓴 책은 2020년 미국에서 먼저 출간('Eliciting Care: Health and Power in Northern Thailand')됐었다.

태국 전체 병상 수 80% 공공, 한국은 10%만



태국의 의료 체계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영리병원과 건강보험을 적용받는 공공병원으로 이분화돼 있다. 자칫하면 경제적 불평등이 의료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지만, 질 높은 공공병원의 접근성을 확대해 이런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일례로 태국에선 보통 읍 단위보다는 크고 군 단위보다는 작은 행정단위별로 최소 한 개의 공공병원(10~90병상)이 자리하고 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까지 갖추고 있는 이런 지역 거점 공공병원은 학교, 우체국, 주민센터와 같이 지역의 필수 인프라로 여겨진다. 실제로 태국 전체 보건의료기관 4만3,245개(2021년 기준) 중 민간 병원은 72%를 차지하지만, 전체 병상의 80%는 공공병원에 속한다. 입원 치료를 제공하는 상급 병원의 비중이 공공병원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은 전체 병상 수의 약 10%만이 공공이 설립해 운영하는 의료기관에 속한다.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지난해 12월, 저서 '휘말린 날들'이 제65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 뒤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류기찬 인턴기자


서 교수는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은 공공에서 제공하지만 의료를 제공하는 데서는 공공병원의 비중이 굉장히 적다"며 "반대로 태국은 아주 영리화된 의료시장이 있는 반면에 제공되는 의료의 대부분은 공공 의료기관이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의료 필요한 곳에 의사... 3년 지방 의무 근무

19일 서울의 한 의과대학 모습. 연합뉴스


태국 의료의 높은 공공성은 의료인 양성 방식에서도 기인한다. 태국 정부는 1972년부터 사립 의대를 포함한 모든 의대, 국공립 간호대, 치대, 약대 졸업생은 정부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는 대신 3년간 지방에서 의무 근무를 하도록 했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에서 우선 선발된 전형의 경우엔 12년으로 의무 근무 기간이 늘어난다. 의무 근무를 하지 않으면 1,500만~7,200만 원 상당의 벌금을 내야 한다. 국내에서도 지역 의대를 졸업하면 해당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 복무하는 '지역필수의사제' 등이 검토됐다. 태국 의료인 양성은 자신의 선호와 관계없이 필요한 곳에 가서 의료 행위를 하도록 제약을 받는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태국이 의료 유토피아는 아니다. 태국은 병원 예산의 대부분을 국가 재정으로 지원받는다. 한국처럼 의료진의 처치 행위마다 의료비가 책정되는 '행위별 수가제'가 아니기 때문에, 의료진이 책임의식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으면 '과소 진료'를 당연시하며 의료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또 최근까지 거주지로 등록한 지역의 거점 병원에 가야지만 보편적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해, 환자의 선택권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높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려내는 태국의 의료 현장이 한국에 바로 적용 가능한 형태의 모델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며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파열의 속성과 여파를 헤아리고, 봉합과 재건의 도구들을 찾아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돌봄이 이끄는 자리·서보경 지음·오숙은 옮김·반비 발행·376쪽·2만3,000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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