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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의 자영업 탐구보고서 ④ 학원 운영했던 민석
유명 입시학원들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늦은 시각에도 수강생들이 이동하고 있다. 민석은 한국에서 기간제 교사와 학원 강사를 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학원 운영을 해본 경험이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우리가 일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섭니다. 우리가 일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퇴근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퇴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지만 정해진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영업자들입니다. 한승태 르포작가가 짧은 글이지만 자영업자들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가늠해봅니다.
강사 하다 직접 운영하겠다 나선 학원
월말이면 직원 월급 걱정에 ‘덜덜덜’
잘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학생들 늘어
코로나19 직격탄 맞고 문 닫고 한국행

민석(가명)은 9년 동안 중국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했다. 그 전까지는 지방의 사범대를 졸업하고 쭉 기간제 교사나 학원 강사로 일했다. 중국 생활의 시작도 평범하게 월급 받는 강사였다. 월세와 점심 식비는 별도에 월급이 1만7천위안, 당시 환율로 300만원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목동의 어학원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한달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32살의 봄. 2009년이었다.

쑤저우는 상하이 근교의 대도시다. 베이징에서 국어 일타 강사로 유명했던 원장이 독립해서 차린 곳이었는데 민석이 도착할 당시 직원이 6명에다 원생은 90명이나 됐다. 학원도 시내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 있었다. 학생은 대부분 한국 기업 주재원의 자녀였다. ‘상하이 싱가포르국제학교’(SSIS) ‘이튼’ ‘덜위치’ 같은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가 중국 공립학교에 보낸 학생도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영어의 경우 토플을 공부한다. 토플은 120점 만점인데 학생이 100점 이상을 맞게 하는 게 영어 강사의 임무다.

민석은 영어는 자신 있었지만, 토플은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독해, 듣기, 말하기, 쓰기 중에서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강의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황스럽게도, 민석과 또 다른 영어 강사가 도착하고 나서부터 학생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학생 수가 반토막이 났다. 학원도 원래 있던 빌딩에서 아파트로 옮겼다. 40평짜리 아파트를 임대해 방에다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고 수업을 했다.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원장이 더는 어렵겠다는 말을 꺼냈다. 자기까지 포함해서 돈을 받는 사람이 7명인데 40명 원생으로는 유지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원장은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강사로 일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학생이 있으니 폐업하는 대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학원을 이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여기에 민석이 나섰다. 내 손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다. 평생을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해왔다. 어떻게 가르칠지 어떻게 운영할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해보고 싶었다.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강사들은 다 떠나고 조선족 출신의 행정 직원 1명과 현지인 셔틀버스 운전기사 1명만 남았다. 독립하고 1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학생은 30명도 채 남지 않았다. 매달 그저 직원들 월급 주기 바빴다. 일단 아파트 월세가 100만원이었다. 행정 직원은 오후에 4시간 정도만 일했기 때문에 한달에 3천위안, 한화로 50만원 정도를 받았고 운전기사는 8천위안, 한화로는 150만원 정도를 받았다. 혼자 살던 집은 정리하고 학원으로 쓰는 아파트로 옮겼다.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직원들보다 민석이 가져가는 돈이 더 적은 달도 간혹 있었다.

민석은 홀로 학원을 운영한 지 1년쯤 됐을 때 결론을 내렸다. 직원을 모두 내보내기로.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게 이렇게나 무거운 짐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제야 원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생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다시 강사로 가겠다는 거지? 원장의 선택이 현명했다. 그게 스트레스에 무너지지 않는 길이었다. 월말이면 직원 월급 줄 돈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면 해고밖에 없는데, 그것도 못 할 짓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 만큼 가까울 때는 더더욱. 사실 민석은 인수를 결심한 순간부터 그들을 내보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절박해지기까지 1년이 걸린 셈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한가지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당장 돈이 급하다고 아무거나 손대면 더 헤매게 된다는 걸.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것을 제대로 하자. 그즈음에는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 민석이 아무리 쉽게 문법을 설명하고 듣기 요령을 알려줘도 한계가 있었다. 학생 대부분이 외국 생활을 한 덕분에 영어로 듣고 말하는 데는 익숙한 편이었다. 문제는 단어였다. 대부분의 학원에서는 가르치는 단계의 단어만 정리해준다. 예를 들어, 7단계 수업을 하면 지문에 나와 있는 단어 중에서 6~7단계 수준의 단어만 정리해서 암기하도록 한다. 그런데 학생 중에 자신의 레벨보다 낮은 수준의 단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으로 치자면 어휘력은 기초 체력이다. 이게 바탕이 되지 않으면 어떤 기술도 소용이 없다. 민석은 높은 단계 수업을 할 때도 훨씬 낮은, 2~3단계 수준의 단어까지 다 공부시켰다.

민석이 중국에서 학원 운영을 하며 강연할 때 쓰던 칠판. 민석 제공

이 준비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민석의 하루는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아침 8시쯤 잠에서 깬다. 일어나면 씻고 바로 단어 정리부터 시작한다. 수업에 쓰는 교재뿐 아니라 시중에 나온 교재 대부분을 뒤져서 단계별로 단어를 정리한다. 낮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나가서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을 때는 중국어 교재를 가지고 나가서 단어를 외웠다. 점심 먹고 돌아와서도 수업 준비는 계속 이어졌다. 각종 문제집에서 좋은 문제를 골라내서 자신만의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작업을 첫 수업이 시작하는 오후 5시 반까지 계속했다. 4년 정도 하자 자신만의 강의가 자리를 잡았다. 단어 정리는 중국을 떠날 때까지 계속 이어갔다. 단어 정리를 다 하면 하루에 A4용지로 적을 때는 6장, 많을 때는 10장 정도 분량이 나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세어보니 그렇게 정리한 자료가 전부 A4용지로 2700장 분량이었다.

민석은 더는 조급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부담을 떨쳐놓으니 차분하게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민석이 6개월 이상 가르친 학생은 모두가, 정말로 모두가 성적이 올랐다. 민석의 최고 히트 상품은 어느 중학교 남학생이었다. 다른 학원은 안 다니고 민석에게만 꾸준히 배웠던 이 친구가 토플을 112점을 맞았다. 이 학생의 친구 중에 매년 방학마다 부모가 서울에 보내 영어 과외를 받게 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도 보낸 학생이 있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토플 점수가 60~70점대에 머물렀다. 이 일이 학부모 단톡방에서 화제가 되면서 학생이 부쩍 늘어났다.

혼자서 학원을 꾸린 지 3년쯤 됐을 때는 원생이 40명에 가까워졌다. 이 시기에는 연봉이 1억원을 넘었다. 한국에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액수였다. 돈을 많이 버는 것만큼이나 좋았던 건, 내가 옳다고 믿는 교육 과정, 방식대로 아이들을 가르쳐서 성적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민석은 어째서 성공한 사업가들이 그렇게 기고만장한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믿는다. 모두가 안 될 거라고 입을 모았다. 학부모가 학원에 전화해도 받을 사람이 없는데? 단어 많이 외우면 좋은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셔틀버스가 없으면 아이들이 직접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도시에서? 그런데도 이 학원에 다닐 거라고? 제정신이야?

성적이 오르니까 그런데도 찾아왔다. 학생들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예전 동료들과는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다. “민석 샘 오고 나서 학생들이 너무 많이 빠져나간다”며 투덜댔던 선배들이 이제는 같이 일하고 싶어 했다. 한번은 민석의 학원 인근에 서울대, 연고대 출신의 강사들이 모여 만든 학원이 생겨 잔뜩 긴장한 적이 있다. 정작 그 학원은 3년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증명해 보인 기분이었다. 물론 한계도 명확했다. 이 이상으로 학원을 키우기는 불가능했다. 40명이 민석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중국에 온 지 9년째 되던 해였다. 학생 수는 부침이 있어서 연봉 1억원은 옛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고 번 돈은 거의 쓰지 않고 모았다. 한국은 은퇴하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중국은 봉쇄 수준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봉쇄 시작하고 3개월 동안은 학생이 1명도 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민석은 ‘줌’ 수업도 할 줄 몰랐다. 위챗 영상 통화로 수업을 어찌어찌 이어가 보려고 했지만, 학생, 학부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월급을 챙겨야 할 직원은 없었지만, 이제는 아내가 있었다. 월세는 계속 빠져나가는데 6개월 가까이 제대로 된 수입이 없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9년 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포기해야 했지만, 당시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민석은 서울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한다. 원래는 학원을 열 계획이었지만 한국을 9년 넘게 떠나 있었던 만큼 어려울 것 같다. 예전 생활이 그립기는 하다. 가장 아쉬운 건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는 거다. 학교는 잡무가 너무 많다. 남자 기간제 교사는 대개 학생부에 배정받는데 여기서 지난해에 작성한 공문만 200건이 넘었다. 방학에는 생활기록부 쓰는 데 매달려야 한다. 오롯이 수업에 집중하기에는 학원이 더 좋았다.

무엇보다 내 사업을 할 때는 일이 안겨주는 희로애락이 최대치로 증폭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당장 큰일이 날 것 같다가, 학생들이 늘어나면 온 세상이 내 것 같다. 내 인생을 내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기분이다. 월급 받는 강사일 때는 매사가 심드렁하기만 한데 말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내 사업을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란 게 있다. 민석은 그 희열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될 날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 한승태 르포작가 l 대학을 졸업하고 꽃게잡이 배, 주유소, 양돈장 등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퀴닝’ ‘고기로 태어나서’ ‘어떤 동사의 멸종’을 썼다. 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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