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1년째 공석에 여성정책국·권익증진국 위축…윤 정부 인식 드러내
가족 정책만 챙기고 성평등 문제 뒷전…여가부는 “제 기능 다해” 해명
가족 정책만 챙기고 성평등 문제 뒷전…여가부는 “제 기능 다해” 해명
한국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지난 2월 1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 이상 성평등 후퇴는 없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을 즉각 파면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주간경향] “쟁점이 되지 않을 만한 정책에만 역량을 투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있어야 할 이유를 성차별 해결이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여성을 돌보는 정도의 보수적인 기준으로 바꾸고 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지난 2월 17일 통화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후 2년 반의 여가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마디로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월 7일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고 올렸다. 왜 여가부를 폐지해야 하는지, 성평등 정책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등의 부가설명이 없는 단 일곱 글자의 짧은 대선 공약이었다. 2025년 2월 현재 윤 대통령은 여가부를 폐지하지 못했다. 국민의힘이 여가부 폐지가 담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그럼에도 그사이 존폐의 기로에 선 여가부는 부처로서의 역할과 의미를 잃어갔다. 2월 20일로 1년째 장관직이 공석인 현실은 이 정부의 여가부 홀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제폭력 심각한데 소극적인 여가부
여가부 안팎에선 여성정책국과 권익증진국의 힘을 뺀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성정책국은 성평등 정책을 총괄하며 주기적으로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행상황을 점검하는 부서다. 권익증진국은 여성·아동·청소년 대상 범죄 대응을 담당한다. 권익증진국장은 지난해 3월부터 공석이다가 6월부터 8개월째 전담 직무대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여가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통화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여가부를 폐지하려고 하니 여성정책국과 권익증진국 업무에 힘을 실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당연했다”고 말했다.
여가부는 여성폭력 사건이 터져도 입장 내는 것을 주저하고 대책도 뒤늦게 내놓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교제 살인 사건이 벌어진 뒤엔 3일 만에 입장을 냈다. 여성폭력방지위원회 제2전문위원회를 열어 관계 부처와 교제 살인 대책을 발굴하겠다고 했지만 제2전문위 회의는 지난해 5월 14일 열린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여가부가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제2전문위 개최 결과를 보면 교제폭력처벌법 제정과 관련해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을 현시대에 맞게 재정립하고 정의 규정에 교제폭력 피해자를 포섭할 수 있도록 개정” “여성폭력방지기본법도 교제폭력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는 방안 검토 필요” 등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법무부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개정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등을 다루는 여성폭력방지위 제1전문위도 지난해 12월 4~6일 ‘딥페이크 성범죄 대응 강화 방안 피해자 보호·지원과제’를 안건으로 열렸지만 서면 회의에 그쳤다. 성착취물 등을 삭제 지원하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예산은 지난해 딥페이크 성범죄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자 국회에 제출된 2025년도 예산안에 소폭 증액돼 담겼다.
여가부는 지난해 9월 중앙성별영향평가위원회를 비상설화하는 성별영향평가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가 여성계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성별영향평가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을 수립·시행할 때 성평등에 미칠 영향을 평가해 그 정책이 성평등 실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위원회가 상시적으로 이 제도를 운영·심의해왔는데, 여가부는 특별히 필요한 때에 한해 구성·운영하도록 바꾸려고 했다. 입법예고안에는 ‘구성 목적을 달성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위원회를 해산할 수 있다’는 조항도 담겼다.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위원회 기능을 무력화시킨다는 비판이 일었다. 여가부 관계자는 통화에서 “반대 의견들을 검토했고 입법예고 이후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는 진행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2023년 5월 10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관계자들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가족부가 폐지가 아닌 성불평등 해소를 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저출생 해결 중요하지만 성평등 빠지면 안 돼”
언론 등이 장관 공백으로 ‘부처 간 협업이 안 된다’, ‘성평등 정책을 내놓지 않는다’고 비판할 때마다 여가부는 설명자료를 냈다. “타 부처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주요 현안에 철저히 대응하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 체계 강화 방안, 교제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 방안 등 대책을 발표하고 양성평등 정책을 총괄·조정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여가부 관료들은 신규 사업이 적은 여성정책국의 특성 탓에 여성정책국이 소극적으로 보일 뿐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가부는 지난 1년간 ‘일·가정 양립’, ‘저출생 극복’에 집중했다. 장관 대행인 신영숙 차관은 양육비 선지급제, 아이돌봄서비스 등을 강조했다. 문제는 일·가정 양립과 저출생 극복이 중요하지만 다른 성평등 정책과 별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김경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저출생과 같은 인구문제는 젠더 관계와 뗄 수 없기 때문에 그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성평등과 불평등 해소의 관점이 같이 들어가야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어 “단순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여성의 일이기 때문에 여성정책이라는 관점은 문제”라며 “일·가정 양립이 중요하지만 여성정책이라면서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하는 여성과 가족에만 관심을 두는 것도 아쉽다”고 했다.
차기 정부가 출범하게 될 경우 여가부 문제는 또 한 번 불씨가 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가 폐지라는 극단적 방법을 내세우는 탓에 논란이 커졌지만, 이전 정부들에서도 여가부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 여가부는 소속 공무원이 300명이 채 되지 않는 ‘미니 부처’인 데다, 독자적인 정책보다는 다른 부처들의 정책 관련해 성평등의 관점에서 조정하고 협의하는 역할이 크다. 법, 예산, 조직 측면에서 여가부에 힘이 실리지 않으면 제 역할을 다 하기 힘든 구조다. 한 여성계 관계자는 “다음 정부도 여가부를 없앨 수는 없고, 오히려 여가부는 사회의 중요한 어젠다를 갖는 핵심 부서일 수밖에 없다”며 “강력하게 힘을 갖고 성차별금지법과 성별영향평가법 등을 진행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유엔(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지난해 6월 한국 정부에 대한 심의 최종견해에서 여가부 폐지 시도에 대해 우려하며 어떠한 조직 개편에서도 여가부 기능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여가부가 모든 정부부처에서 성 주류화 노력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인적·기술적·재정적 지원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이에 대한 이행상황을 2년 이내로 추가 보고하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성 주류화란 성평등 관점에서 모든 정부·공공부문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위원회는 또 여성 권리증진을 위한 충분한 예산 할당, 여성 발전을 위한 국가계획과 전략 채택을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