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한국금거래소에서 한 관계자가 골드바 등 금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한국경제 허문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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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군 함평추억공작소 1층 특별전시관. 순금 162kg, 은 281kg을 들여 제작된 황금박쥐상이 전시돼 있다. 2005년 제작을 시작해 2008년 완성된 황금박쥐상은 당시 총 28억3000만원의 재료비가 투입되며 ‘혈세 낭비’란 지적이 쏟아졌다. 그러나 현재 가치는 금값 257억3694만원, 은값 4억1840만원으로 총 261억5563만원이 됐다.
장면2.
2월 6일 오후 1시 30분 한국금거래소 접속 대기 인원은 1만6000명에 육박했다. 오전 10시께 대기 인원이 2000명 수준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빠르게 늘며 한때 대기시간이 5시간을 넘기도 했다. 금값 고공행진에 투자자가 몰리며 한국금거래소 홈페이지가 마비된 것이다. 이날 금 한 돈(3.75g)은 56만원 선에서 거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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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금 거래 중심지인 영국. 최근 잉글랜드은행(중앙은행) 지하 금고에서 금괴를 인출하기 위해선 몇 주 동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런던 금값이 뉴욕보다 낮아지자 월가 은행들이 이른바 ‘금괴 수송 작전’에 나서면서 수급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뉴욕 금값은 3000달러 진입을 코앞에 뒀다. 반면 런던 금값은 뉴욕보다 20달러 이상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금값이 지난 1년간 두 배 가까이 뛰었다. 2월 14일 금 1g은 16만3530원을 기록했다. 1년 전(8만6030원)보다 90% 비쌌고 지난해 말(12만7850원)보다 27.9% 올랐다(한국거래소). 돌잔치 선물을 사기 위해 금은방을 들른 소비자들은 가격표를 보고 “차라리 현금으로 주는 게 낫다”며 발길을 돌린다. 최근엔 1g짜리 돌반지를 맞추는 경우도 늘고 있지만 이 경우도 20만원가량 든다.
◆전 세계 돈이 ‘금’으로 향하는 이유
금값은 3~4년 전부터 오름세를 보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가자지구 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와 탈세계화, 각국 중앙은행들의 금 비축 움직임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2022년 2월 한 돈에 30만원 하던 금값은 2025년 2월 60만원까지 급등했다.
박태형 우리은행 TCE시그니처센터 프라이빗뱅커(PB)는 “러시아가 서방으로부터 제재를 받는 과정에서 달러 자산이 다 동결됐다”며 “‘달러 자산을 갖고 있으면 혹시나 미국과 문제 생겼을 때 러시아처럼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미국의 대척점에 있는 중국과 브라질·인도 등 주요 신흥국이 미 국채를 줄이고 금을 사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중앙은행들은 3년 연속 1000톤 이상의 금을 사들였다. 지난해 연간 투자액은 1186톤으로 4년 만에 최고였다. 미국 대선이 있었던 지난해 4분기에는 전년 대비 54% 증가한 333톤의 금을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세계금위원회).
최근엔 미국 중앙은행(Fed)의 연이은 금리인하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으로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상승) 재발 및 경제 불확실성 우려가 커지면서 안전자산인 금 매수세가 빠르게 늘어났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전무는 “강달러, 고금리 환경 속에서도 금 가격이 오르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관세와 미·중 무역전쟁은 예상됐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돌파구로 찾은 것이 달러와 달리 이자도 없는 금”이라며 “금은 시대를 막론하고 안전자산으로 통했다. 인플레이션 헤지(위험 제거)가 되는 금에 돈이 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 대형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올해 연말 금값 전망치를 온스당 310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이 경우 올해 금값 상승률은 26%가 된다.
그래픽=송영 기자
◆금값에도 붙은 김치 프리미엄
국내 금값에 국제 시세보다 10~20% 비싸게 거래되는 ‘김치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예컨대 국내에서 1kg의 골드바를 사려면 1억6000만원이 든다. 부가세 10%는 따로다. 런던의 금값은 1kg에 1억3600만원이다. 국내에서 살 경우 부가세를 빼고도 2400만원 비싸다.
강지연 하나은행 송파중앙지점 VIP PB는 “정치적 불확실성 등의 이슈로 불안감을 느낀 투자자들의 금 매입 수요가 단기간 급증해 국제 금 시세에 비해 더 큰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금값이 오르자 가수요가 따라붙었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며 상승폭을 더 키웠다. 예를 들어 국제 금값이 100달러 올랐다면 한국은 100달러 이상이 오른다. 국제 거래는 달러로 거래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른 만큼 반영되는 식이다.
금값은 수급 상황에 따라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최근 미국이 금을 쓸어담고 있다. 경제 불확실성에 미국 내에서 금 수요가 급증하며 미국 금값에 ‘프리미엄’이 붙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금에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우려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금을 반입하려는 투자자들이 증가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 이후 금융사들이 393톤 상당의 골드바를 뉴욕상품거래소 금고로 옮겼다(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골드바 판매 중단 러시
국내에선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골드바 주요 공급처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조폐공사는 2월 11일 시중은행에 골드바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골드바는 5대 은행(신한·하나·KB국민·우리·NH농협)에서 2월에만 500억원 넘게 팔렸다. 지난 1월(160억원)과 비교하면 3배 이상 증가했고 1년 전(66억원)보다는 약 8배 급증했다.
조폐공사가 금 판매를 중단하면서 일부 시중은행의 골드바 판매에도 제동이 걸렸다. 국민은행은 2월 12일부터 판매를 일시 중단했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도 2월 14일부터 한국금거래소에서 공급받아온 골드바 판매를 멈췄다. 다만 신한은행은 10g·100g·1kg 등 3종의 골드바는 판매하고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LS그룹 계열사 LS MnM에서 공급받아 자체 제작하다 보니 수급 부분에서 조금 수월하지만 대기 시간이 길다”고 설명했다.
골드바 인기에 힘입어 덩달아 골드뱅킹(금 통장) 인기가 올랐다. 골드뱅킹은 고객이 은행 계좌에 돈을 입금하면 은행이 국제 시세에 따라 금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2월 18일 기준 국민·신한·우리은행의 골드뱅킹 잔액은 총 8864억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82.9% 급증했다. 시중은행 중에선 국민·신한·우리은행에서 골드뱅킹을 판매한다.
그래픽=송영 기자
◆금 투자 할까 말까
주요 시중은행 PB들은 무분별한 금 투자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국내 금값이 단기간 급등한 만큼 조정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상승 추세가 계속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함박눈 신한은행 PWM잠실센터 PB는 “(리스크 최소화를 위해)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금값 조정이 있을 때마다 분할 매수하는 방법을 추천한다”고 했다.
그는 “(연말까지) 시세보다 10%가량 더 오를 가능성도 있다”며 “금은 변동성이 워낙 크다. 자산 증식보다는 헤지 차원으로 (투자를)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장기적 자산 배분 차원으로 금 투자를 권유했다. 금은 주식, 채권, 원유 등과 상당히 낮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어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어느 자산과 함께해도 좋다는 의견이다.
강지연 PB는 “금에 5~10% 정도 분산 투자할 것을 권장한다”며 “국내 일시적인 금 현물 공급 부족 사태로 인해 국제 시세와 국내 금 가격의 괴리율이 심해지고 있다. 국제 금 선물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 및 펀드 투자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자산의 크기에 따라 접근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박태형 PB는 “단순히 금이 올라갈 것 같아 투자를 하고 싶다면 비과세인 KRX 금시장 참여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산가로서 금 투자를 고려한다면 ETF나 금 펀드를 활용하면 좋다. 환율 변동에 노출하는 언헤지 상품들로 담아야 시장에 변동성이 있을 때 포트폴리오로서 효과를 확실히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금값이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건 맞지만 20년 정도 쉬어 가기도 하고 70% 폭락하는 구간도 나온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채권보다 수익도 크지만 더 위험한 자산”이라고 당부했다.
◆세제 혜택·수수료 등 비교
금 투자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투자 방식에 따라 수익률은 물론 세제 혜택, 수수료 등이 다르다.
전통적으로 골드바 등 금 실물을 직접 구매하는 방법이 있다. 금이 가지는 실물 화폐와 안전자산의 특징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투자다. 은행이나 금은방, 편의점 등 오프라인을 방문하거나 홈쇼핑 등 온라인으로도 구매 가능하다.
하지만 실물 투자는 세금도 떼이고 사고팔 때의 가격 차이도 꽤 커 시세 차익을 노리기 쉽지 않다. 은행권 관계자는 “금값이 한 해에 많이 올라도 20% 정도 선인데 매수 시 부가가치세 10%를 내고 나면 사실 남는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은행이나 증권사를 통해 KRX 금시장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금 거래 계좌를 따로 개설해 KRX 금을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다. 1g 단위로 투자가 가능해 진입장벽이 낮고 비과세 혜택도 있다.
골드뱅킹은 실물 거래 없이 0.01g 단위로 소액투자가 가능하다. 다만 거래 수수료 1%와 매매 차익에 대한 배당소득세 15.4%를 내야 한다.
ETF나 금 펀드로 투자하면 비용을 아끼면서 손 쉽게 투자할 수 있다. 양도세와 배당소득세를 내야 하지만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활용해 투자하면 절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2월 들어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금 현물과 선물 ETF 6종목의 순자산 총계는 1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1년 전과 비교해 4배 가까이 증가했다.
다만 해당 투자 상품이 금 가격을 추종하는지, 채굴이나 제련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지에 따라 성과 측면에서 굉장히 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어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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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째 금 안사는 한국은행
12년째 금 안사는 한국은행
각국 중앙은행이 금 매입에 열중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행은 금을 사들이는 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김중수 전 한은 총재 시절이던 2013년 20톤의 금을 추가로 사들인 뒤 12년째 금 보유량을 총 104.4톤으로 묶어왔다(한은 경제통계시스템).
유동성이 낮고 보관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폭락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며 금 매입에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다. 다만 한은의 금 보유량 순위는 2013년 말 세계 32위에서 지난해 말 38위로 여섯 계단 떨어졌다. 한은이 보유한 금은 매입 당시 가격으로 표시되는데 올해 1월 기준 47억9000만 달러 규모로 전체 외환보유액의 1.2%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