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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1985년 미국 뉴욕 신생아 납치사건
생후 사흘 된 딸 마를렌과 퇴원 중
범인, 아기 머리에 총 겨누며 위협
납치 차량 추적·용의자 추렸으나
경찰 수사 난항… "계획 범행" 확신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85년 10월 마를렌 산타나가 태어난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브룩데일 병원. 브룩데일 병원 홈페이지 캡처


1985년 10월 21일 오후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의 브룩데일 병원.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이주민 프란체스카 산타나(당시 23세)는 뛸 듯이 기뻤다. 사흘 전 낳은 딸 마를렌과 함께 퇴원해도 좋다는 의사 진단이 나왔다. "아기는 이제 아주 건강해요." 셋째 아이인 마를렌이 출생 직후 심한 황달기를 보여 마음고생을 했지만, 빌리루빈(담즙 내 성분 중 하나로 황달의 원인) 수치가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된 덕분이다.

퇴원 2시간 전 산타나는 신생아실에 있는 마를렌 면회를 갔다. 유리창 너머의 마를렌은 요람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10여 분간 딸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돌아선 순간, 창문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이 아기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금발머리를 한,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어느 아이가 당신의 아기인가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산타나는 자랑스럽게 마를렌을 가리켰다. "정말 조용하고 착한 아기처럼 보여요. 확실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기네요." 아기를 무사히 낳은 것을 축하한 뒤 그는 자리를 떴다. 산타나도 병실로 돌아갔고, 더 이상 '금발 여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예쁜 아기" 축하 후… 아기 향한 총구

마를렌 산타나의 2세(왼쪽 그림) 때와 3세 때 모습을 추정한 스케치. 미국어린이찾기재단(Child Find of America) 제공


마를렌이 마지막 검진을 받고 퇴원 수속을 마친 그날 오후 9시쯤, 날이 어둑해지자 기온도 급격히 떨어졌다. 가을밤 뉴욕 거리에는 사람 한 명 없이 낙엽만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편 토마스는 고향인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 머물고 있어, 그 대신 사촌 여동생과 시누이가 산타나를 찾았다. 아직 회복 중인 산모를 대신해 소지품을 정리하고, 기저귀와 아기용품 등 병원에서 준 선물이 담긴 분홍색 가방도 챙겨 들었다.

병원 입구를 나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찰나, 산타나는 낯익은 얼굴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신생아실 앞에서 마를렌에 대한 찬사를 쏟아낸 금발 여성이었다. "당신을 하루종일 기다렸어요. 어디로 가나요?" 산타나가 '집으로 간다'고 답하자마자, 그 여성은 돌연 검은색 권총을 꺼내들었다. 총구는 마를렌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조용히 하고 따라와." 금발 여성은 '내 말을 안 따르면 아기 머리를 쏘겠다'고 경고했다. 산타나의 몸은 돌처럼 굳었다. 모든 일이 마치 슬로 모션과 같이 움직이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엄마 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산타나와 사촌 동생, 시누이 등 무력한 3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주길 기도하며,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발길을 멈춘 곳은 6개 블록이 떨어진 외진 폐차장 앞이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량을 제외하면 주변에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총은 여전히 마를렌의 머리를 향해 있었고, 금발 여성은 주변을 살피며 다음 행동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멀리서 불빛을 비추는 흰색 차량이 나타났다. 금발 여성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엄마 산타나의 품에서 아기를 빼앗았다. 뒤이어 차량 쪽으로 멈추라는 듯 손을 흔든 뒤, 마를렌과 함께 뒷좌석에 재빨리 올라 문을 쾅 닫았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산타나가 마를렌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딸이 태어난 지 고작 3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39년, 긴 기다림의 시작

1985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신생아 납치 사건'을 보도한 뉴스데이(Newsday) 기사. 뉴스데이 제공


뉴욕 전역에서 대대적인 '마를렌 찾기'가 시작됐다. 1985년 10월 18일생인 마를렌은 흰 담요에 분홍색과 파란색 무늬, 토끼가 새겨진 포대기에 싸인 채 납치됐다. 출생 당시 체중 3.2㎏, 키 55㎝였고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기였다. 선천적으로 발 앞쪽이 안으로 휘어진 '중족골 내전증' 진단을 받기도 했다. 마를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없었던 탓에, 이런 발 모양을 보여 주는 사진이 실종 전단지에 실렸다.

경찰은 산타나 일행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 추적에 나섰다. 납치범의 키는 약 160㎝, 몸무게 60㎏ 정도로 백인 또는 히스패닉계로 추정됐으나 억양이 특이하진 않았다. 금발로 염색한 듯한 짧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고, 가발을 착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마를렌을 빼앗아 타고 달아난 차량은 옆면에 빨간색 글씨가 써 있는 1976년식 쉐보레 말리부 차량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해당 차종으로 등록된 택시가 없어 '무면허 택시'로 추정했지만, 공범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했다.

"가장 당혹스러운 아기 납치"

1985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신생아 납치 사건 용의자를 그린 두 번째 스케치. 찰리 프로젝트(The Charley Project) 제공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작성한 심리프로필에 따르면, 범인은 최근에 아기를 잃었거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 여성'일 가능성이 컸다. 당시 수사를 이끈 에드워드 카펠로 뉴욕경찰서 경위는 "아기 몸값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가장 그럴 듯한 이유"라고 UPI통신에 말했다. 경찰은 납치 시점 직전, 유산이나 사산을 겪은 여성이 있는 지역 병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여성의 명단이 작성됐으나 용의자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여성은 찾지 못했다.

특이한 점은 마를렌 납치 하루 전, 뉴욕 맨해튼의 다른 병원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생후 2개월 된 아기 크리스토퍼 모건은 맨해튼의 컬럼비아 장로교 의료센터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크리스토퍼는 저체중으로 입원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며칠 뒤 무사한 상태로 발견됐다. 납치범은 사산된 아기의 산모였다. 크리스토퍼를 자신의 아이로 속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를렌 사건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한 달 반이 흐른 1985년 12월, 경찰은 기자회견을 통해 "수사에 실질적 진전이 없었다"고 인정했다. 산타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존에 제시했던 보상금 2만 달러에다 5,000달러를 추가로 내걸었고, 눈물로 호소했다. "크리스마스까지 아기가 집으로 돌아오길 원해요. 제발 제 아기를 데리고 있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세요. 제 머릿속에는 오직 아기를 되찾는 생각뿐이에요. 그 아이는 제 아기예요. 저는 그 아이가 필요해요." 가족은 전단지 수천 장을 인쇄해 도시 전역에 뿌렸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1985년 12월 15일 프란체스카 산타나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뉴욕데일리뉴스의 신문 기사. 산타나는 두 달 전 생후 3일 된 딸을 신원미상 '금발 여성'에게 빼앗겼다. 뉴욕데일리뉴스 제공


"반드시 다시 만날 것"… 희망은 여전



사건의 충격과 여파는 컸다. 특히 브루클린 지역사회 전역에선 병원 보안과 신생아 보호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이어졌다. '마를렌 사건' 후 뉴욕은 물론, 미국 전역의 병원들이 신생아 납치 방지를 위해 보안 시스템을 강화했다. 신생아 병동에는 신분증을 가진 병원 직원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신생아에게 추적 가능한 인식표도 부착했다.

그러나 수사에 진척이 없자 시간이 지날수록 마를렌 사건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산타나는 마를렌 납치 1년 후쯤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끊임없이 쏟아지던 전화와 제보가 이젠 거의 줄었다"고 말했다. 납치 2년이 되던 날, 마를렌의 2세 모습을 그린 합성 그림이 공개되긴 했다. 경찰도 새 전단지를 만들어 도시 전역에 배포했지만, 확실한 단서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1989년 1월 25일 방영된 프란체스카 산타나의 TV 출연 영상 캡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Unsolved mysteries)' 홈페이지 캡처


마를렌 사건은 수차례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Unsolved Mysteries)' 등을 통해 재조명됐다. 실종 아동지원단체 '어린이찾기재단(Child Find of America)'은 35년 넘게 마를렌을 찾기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23년 10월 18일 재단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을 통해 마를렌의 38세 생일을 기념하며 현재 모습을 추정한 사진을 공유하기도 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기였던 마를렌은 이제 30대 후반 성인이고, 그를 납치한 범인은 60대가 됐을 것이다.

뉴욕에서 갓난아기 딸을 잃은 산타나 가족은 더 이상 미국에서 사는 게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들은 결국 고향 도미니카로 돌아갔고, 아이 두 명을 더 낳았다. 그러나 매년 10월 18일이 되면 '마를렌의 생일 파티'를 열었고, 지금도 역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언젠가는 마를렌을 되찾을 것이고, 딸의 생일을 온전히 축하해 줄 날도 올 것으로 굳게 믿으면서.

2023년 제작된 마를렌 산타나 실종 전단지. 1985년 10월 생후 3일 만에 납치된 마를렌의 38세 모습을 추정해 만든 사진이 실려 있다. Missing People in America 제공.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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