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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아프면 병원에 가고, 병원에 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전제가 된 이 문장이 과연 당연한 사실이 된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취제도 진통제도 항생제도 없던 시절, 세균과 바이러스의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 위생과 청결에 대한 개념도 없던 시절이 머나먼 옛날이 아니라 기껏해야 100년, 200년 전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무지의 시대에 어떻게든 살리려 애썼던 의사들, 그리고 그 의사들에게 몸을 맡겨야만 했던 환자들의 이야기.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가 개발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예방 신약 ‘레나카파비르’(lenacapavir). AP


사이언스라는 학술지는 매년 올해 최고의 과학성과를 뽑는데 2024년 12월 13일에는 미국의 길리어드사가 개발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즉 HIV 백신 레나카파비르를 '24년 최고의 과학 성과로 선정했습니다.

에이즈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는 병을 지칭하는 진단명이고 이 병에 이환이 되면 면역이 저하되면서 각종 감염병과 더불어 희귀한 종양 질환까지 발생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매해 100만명 이상의 에이즈 환자가 발생하는데 바이러스의 변이가 너무 심해서 백신 개발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레나카파비르는 기존 백신과는 달리 아예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단백질 껍질을 공략하는 접근법을 택해 굉장히 성공적인 임상 결과를 냈습니다. 접종 후 6개월 동안 약 99.9% 의 보호 효과를 갖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질병의 진행을 억제할 수 있는 약도 나왔죠.

한때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인식이 있던 에이즈도 이제 슬슬 극복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오늘은 바로 이 에이즈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때는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CDC, 즉 미국의 질병관리청에서 주관하는 연구 기관인 Morbidity and Mortality Weekly Report(MMWR)에 1981년 6월 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전에 젊고 건강했던 남성들 사이에서 발생한 '주폐포자충 폐렴'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이는 주폐포자충이라는 일종의 기생충이 일으키는 폐렴을 말합니다. 일반적 감염은 아니에요. 정상 면역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감염을 못 일으키거든요. 이때까지 관찰되었던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항암 화학 요법 중인 암환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전에 젊고 건강했던 남성들한테 발생했습니다. 5명 각각의 이전 병력 또는 행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5명의 환자 모두 보고서 초판본이 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역학조사관과 진료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은 이 미지의 질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서 연구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 결과 5명 중 한 명이 수년전에 호지킨 림프종에 이환되었다가 회복되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다른 환자들에게서 주폐포자충 외에 다른 질환들, CMV나 칸디다증과 같이 일반적으로는 잘 감염이 되지 않는, 즉 기회 감염 질환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공통점을 확인하게 되는데, 우연히도 이 5명의 남성들은 모두 남성 동성애자였습니다.

CDC에서는 파악한 사실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학회에 알리고, 병원들은 부랴부랴 자신의 환자에게서 혹시 이러한 질환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5명의 환자 모두를 너무 어이없이 잃어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CDC는 이 질환을 아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앞서 6월 5일에 보고서를 냈다고 했죠? 그리고 6월 8일에 바로 이에 대한 대응을 위한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합니다. 그 사이 각 병원에서도 각각의 환자들 중에 보고서에 묘사 되었던 환자들과 비슷한 사례들을 보고 하게 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진단명도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미지의 질환인데, 면역을 파괴하는, 그런데 주로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질환이었어요.

그렇기에 CDC 는 무척 일을 서두릅니다. 6월 말에 이미 NIH,미국의 국립 보건원은 지역 병원에서부터 해당 질환군에 속하는 환자들을 넘겨 받아 입원 치료를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9월에는 관련 컨퍼런스를 CDC와 국립 보건원이 공동 주최합니다. 여기서 관련 질환을 본 경험이 있는 의료진들끼리의 오프라인 소통이 처음으로 있었고, 질환의 특징을 잡아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컨퍼런스 직후 학회는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 중인 LGBTQ 커뮤니티의 지역 간행물을 통해 이런 병이 돌고 있음을 알리고 연구 자금을 모금하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같은 해 12월에는 심각한 면역 결핍 사례가 총 337건 보고 되었고, 당시 CDC는 숨겨진 질환자가 대략 4만2,000명이 있을 거라 추정하게 됩니다. 바로 다음 해에 이 질환을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즉 AIDS라고 이름 짓게 됩니다.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수혈로도 번지고 있던 이 질환을 감시 체계에 넣어 더 이상 신생아나 혈우병 환자에게 번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바이러스 검출이 아직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1982년에는 미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 질환을 확인하게 되었고, 각국이 협력하여 연구를 진행하게 됩니다. 1983년에는 이성애자들 끼리도 번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문서화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 드디어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레트로 바이러스를 분리해 에이즈의 원인균, 즉 HIV 바이러스를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이때부터 HIV로 부른 건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다가 1986년에야 정식으로 HIV로 부르게 됩니다.

처음엔 이 질환이 대체 어떤 경로로 번지는 지에 대해서도 몰랐기 때문에 이쪽으로 여러 가설들이 세워졌습니다. 우선 처음 환자들이 주로 남성 동성애자 또는 정맥 주사 약물 사용자들이었기 때문에 라이프 스타일이 문제란 인식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 후반에 들어서야 이 질환이 체액을 통해 전염되고 오염된 혈액 등에 노출이 되어 번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때까지는 바이러스가 검출이 되지 않아 검사가 안되었다는 겁니다. 가장 문제가 된 혈우병 환자처럼 계속 수혈을 받아야 하는 환자군이었는데 이 때문에 81년부터 14년까지 약 1만5,000명의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에 의환되었습니다. 또 산모들이 아무래도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수혈을 받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로 인해서도 많은 에이즈 감염이 있었습니다.

후에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상당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환자들 중에서는 나는 동성애자의 피는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헌혈 담당자가 임의대로 동성애자는 헌혈이 어렵다고 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고 해요. 동성애자가 무조건 에이즈 환자인 것이 아닌데 당시에는 알려진 것들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던 거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1년 4월 25일 브라질 리오 데 자네이로에 있는 병원을 방문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FP=연합뉴스


다행히 1984년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분리에 성공하고 1985년에 최초의 혈액 검사가 개발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검사가 시행되게 된 거죠. 더 큰 성과는 바이러스를 검출하고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과학계와 의료계는 당시 기준으로 이르면 2년 내에 늦어도 5년 내에 백신이 개발 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와 함께 에이즈 환자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도 이루어졌는데,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다 아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에이즈 화자를 직접 방문해 장갑을 끼지 않고 악수하는 장면을 전세계에 송출함으로써 이 바이러스가 피의 교환이 있지 않는 이상에는 감염이 되지 않는 종류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무튼, 백신 개발과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런데 HIV가 일반적인 바이러스가 아니라는게 문제였습니다. 이 놈이 공격하는 게 바로 면역이잖아요? 그 중에서도 주로 바이러스 감염에 대응하는 CD4 T림프구를 찾아내 파괴합니다.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두고 마치 스마트 무기와 같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전사효소의 오류가 발생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고, 또 동일한 세포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간에 발생하는 재조합 등으로 인해 HIV는 초광속으로 진화하는 특징을 띄고 있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한명의 환자에게서 수십억가지의 다른 형태를 지닌 HIV가 동시에 존재할 지경입니다. 이 때문에 약이 나와도 내성 변종이 너무 빠르게 나타났는데, 1987년 azt가 최초로 항 HIV 약물로 승인되었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변종을 맞이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지속적인 노력에 따라 CCR5 유전자를 억제하면 어느정도 감염이 느려진다는 것을 확인, 이를 이용한 마라비록이라는 약이 2007년 출시됩니다. 뿐만 아니라 비뉴클레오시드 유사체 역전사효소 억제제, 단백효소 억제제, 통합 효소 억제제 등을 섞어서 쓰는 칵테일 요법이 개발되면서 약값이나 치료 순응도가 문제지, 의료진의 관리에 따라 열심히 치료를 받기만 하면 어느정도 기대 여명을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제 개발도상국인데,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에서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일부 국가에서 기대 수명이 34세까지 떨어졌을 정도로 창궐했었는데, 그나마 세계보건기구(WHO)와 국경없는 의사회와 같은 NGO의 활동 그리고 각국의 협조에 더해 제약회사들의 지원들로 인해 이젠 61세 정도까지 늘어난 상황입니다. 물론 아직도 턱없이 열악한 실정입니다. 더욱이 현재 전세계적으로 에이즈 환자가 약 4,000만명이 있다고 하는데, 이중 3,000만 명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결국, 백신으로 이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히 학계에서도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바이러스의 특성 상 보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과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유엔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2030년이면 에이즈 완전 통제가 가능할 거라고 발표했을 정도죠.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윱 랑어라는 분입니다. 2002년부터 2004년 국제 에이즈 학회장을 연임했고 팜액세스 파운데이션이라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의 보다 나은 보건 복지를 위한 국제 비영리 기구를 설립한 분입니다. 비단 에이즈에 대한 연구 뿐 아니라 관련약 또한 최대한 싸게 공급하고자 했던 분인데, 이분이 학회 소속 연구원들과 함께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 에이즈 학회에 참석하러 가던 중 항공기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반군인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에게 피격되어 격추됩니다. 당시 사용되었던 미사일이 러시아 대공미사일 부크였고, 도네츠크 반군이 친러 반군이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러시아가 많은 비난을 받았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비행기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망했는데, 이에 대해서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어떤 사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국제 에이즈 학회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활발하게 활동하던 대가들이 갑자기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군가는 마치 이어 달리기처럼 윱 랑어와 당시 사망한 여러 영웅들의 연구를 이어 받아 계속 달렸던 거 같습니다.마침내 백신이 나왔으니까요. 이것을 계기로 인류가 또 하나의 질환을 정복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낙준 닥터프렌즈 이비인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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