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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그래픽=박구원 기자


19세 때 따돌림을 심하게 당해 지금의 직장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많이 예민해져 있다 보니 피해망상 같은 증상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대학 새내기 시절을 돌이켜보면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똑똑하기까지 하다 보니 여자들의 질투가 심했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선배들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고 수다스럽고 재잘거리는 성격인데 학과 동기들은 보수적인 편이었습니다. 또 학과에 기독교 신자가 많았는데 저는 무교였던 터라 종교적으로 소외되기도 했습니다. 학과 친구들이 아닌 동아리나 다른 모임에서 호감을 보인 친구들도 있었지만 주변 소문만 듣고 저에 대한 태도가 돌변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동아리에서 친해진 친구가 "선배들이 너만 예뻐해 기분이 안 좋고 너랑 있으면 우울해진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와도 한참 후엔 멀어졌습니다. 제가 너무 순수해서 싫다고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19세 때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도 회식은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가 없고, 대체로 공적인 업무로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인간관계를 손절하고, 손절당하기도 해서 지금은 가장 믿을 만한 친구 2명하고만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이라 자주 보지 못해 외톨이나 마찬가지라서 많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부모님은 저를 공주처럼 아끼며 키운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랑받으며 모범생으로 컸으나 제가 중학생이 된 후 전업주부였던 어머니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읍내에서 도시로 학교를 이동하면서 또래 친구들한테 시골 출신이라고 많은 무시와 폭력,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인데 문학 속 여주인공들을 롤 모델로 삼으며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고독한 저를 응원해 보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며 힘겨운 느낌입니다. 트라우마가 심할 때 시를 쓰면 마음이 안정돼 시를 쓰고 있고 동화도 몇 편 썼습니다. 에세이도 치유를 위해 쓰고 있습니다. 조직 문화로 인한 차별을 다룬 소설 '두려움과 떨림'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도 능력을 키워 제 경험을 소설로 남기고 싶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정신과 상담을 거의 매주 받고 있고, 휴직을 두 차례나 했는데도 비슷한 사건을 보거나 자극이 있으면 트라우마가 심해집니다. 지금도 혼자 안정되게 있을 때는 괜찮은데 가끔 트라우마가 재발하면 숨 쉬기 곤란하고 머리가 아플 때가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과 학교폭력을 다룬 화제의 드라마 '더 글로리'도 트라우마가 심해 안 봤습니다. 괴롭힘과 따돌림 경험은 거의 20년 전 일입니다. 저는 왜 이 따돌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이정은(가명·38세·초등학교 교사)



대학 시절 겪은 상처로 힘들게 오랜 시간을 보내왔을 정은씨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간관계로 생긴 과거의 부정적 경험은 단숨에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음에도 정은씨의 마음에 여전히 큰 상처가 남아 있고,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도 부정적 감정을 떨쳐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흔히 왕따로 불리는 어릴 적 집단 따돌림 경험으로 어른이 돼서도 힘들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을 지워내는 일은 누구에게든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정은씨에게는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가까운 친구들의 지원을 받아 인간관계의 신뢰감을 조금씩 회복해 나갈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인간관계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상처도 있지만 친밀감도 함께 얻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정은씨처럼 상처받는 게 두려워 타인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은 고립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커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안타깝지만 이 같은 회피행동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부정적 증상입니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고통을 차단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정은씨에게서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자기애적 방어기제도 엿보입니다. 더 큰 상처를 피하기 위해 인간관계가 어려웠던 원인을 여성들의 질투와 종교 문제 등 외부 요인이나 상황에서만 찾고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우선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인간관계에 대한 정은씨의 경계심이 어쩌면 대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에 시작됐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중학생 시절 시골 출신이라고 무시와 학대에 시달렸다고 언급하면서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죠. 어려운 가정에서 공주처럼 자랐다면서도 친구들의 괴롭힘을 부모님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미 가족 안에서도 존중받지 못하고 고립되는 경험을 했을 수 있습니다. 대학교 때 교우관계가 어려워지면서 정은씨의 고통이 시작됐다기보다 그전부터 가족에게 수용받지 못하고 고립되는 경험을 하면서 관계의 악순환이 시작됐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정은씨에게는 우선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의 회피행동은 인간관계 자체를 피하는 것도 있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 경험을 피하는 행동입니다. 정은씨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당시의 상황을 주로 설명할 뿐, 당시 정은씨가 가졌던 감정이 어땠는지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이와 관련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해야 합니다. 왕따 당한 상황과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트라우마는 피하고 있던 감정을 직면해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피해의 원인이나 가해자에 집중하기보다 그로 인해 생긴 내 마음 상태에 집중해야 트라우마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워서 피해왔던 감정을 다시 마주하고 느끼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꾸준히 받고 있는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정신과 전문의와의 상담은 꾸준히 수용받는 경험을 함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마주해 볼 충분한 용기가 생기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와 더불어 다시 직장 등에서 대인 관계를 차근차근 맺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정은씨에게는 2명의 믿을 만한 친구가 있죠. 두 친구를 자원으로 삼아 신뢰감 있는 관계를 계속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또한 관계를 확장해 보는 것도 필요한데 오프라인 모임이 두렵다면 온라인 모임이나 카페, 오픈채팅 등 상처보다는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간접적인 만남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를 통해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극복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까운 친구를 통해 신뢰감을 단단히 하고, 온라인 모임 등을 통해 대인 관계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공적인 업무로만 연결된 동료들과의 관계도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도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내 감정과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트라우마 경험의 직접 서술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이 감정 소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문학 작품 감상이나 창작 활동을 통해 이상에 몰입하며 도피처로 삼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리에서 사귄 친구가 "순수해서 싫다"는 이유로 멀어져 갔다고 했죠. 정은씨에게서 인간관계에서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한 말일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몰입된 경우 관련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느라 과장됐다고 할 정도로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패턴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누구나 성격이 밝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두운 면이나 마음속 상처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문학 속 여주인공들을 롤 모델로 삼으며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고 언급한 대목도 이와 연관돼 있습니다. 문학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롤모델로 삼을수록 현실 적응이 어렵고 현실을 피하게 돼 더 큰 좌절감을 느끼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회피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의 고통 때문에 트라우마 관련 상황을 피할 수밖에 없는 정은씨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피는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피하기만 하면 정은씨의 고립 상황은 악화되고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보고 질투한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인식도 깊어질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감정을 마주하고 신뢰감 있는 관계 맺기를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을 제한하고 있는 트라우마는 극복될 겁니다. 무엇보다 혼자 반복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감정을 되살리는 상황을 피하기만 하는 데서 벗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이미 해결로 가는 한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당신의 회복을 응원합니다.



※정우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상담 코너 연재를 18일 자를 끝으로 마칩니다. 3월 4일부터는 김지용·오동훈·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의 영화와 드라마 등의 인물 분석을 통한 심리 분석 코너인 '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를 시작합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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