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금호석유화학 여수 고무1공장. 사진=금호석유화학
한국 석유화학기업들의 실적이 연일 악화되고 있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저가 공세, 글로벌 경기침체 때문이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 등 한국의 4대 화학 기업 실적 역시 주춤한 모습이다.
LG화학은 2024년 영업이익이 9168억원으로 전년보다 63.8% 감소했다. LG화학의 영업이익이 1조원을 밑돈 건 2019년 이후 5년 만이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 영업손실 8948억원으로 전년 대비 157.3% 커졌다. 2023년 3477억원에서 적자 폭을 확대하면서 3년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같은 기간 한화솔루션은 영업손실 3002억원을 기록, 전년 6045억원 흑자에서 적자전환했다.
하지만 금호석유화학만은 약간 다른 모습이다. 금호석유화학은 2024년 영업이익 2727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24% 감소하긴 했지만 다른 화학기업들만큼 ‘휘청’할 정도는 아니다.
고부가 합성고무가 실적 견인
금호석유화학의 실적 선방의 주요인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인 합성고무 사업의 선전이 꼽힌다. 기후변화로 천연고무 생산량이 줄어들어 최근 1년 새 천연고무 가격은 40% 가까이 급등했다. 지난해 천연고무는 코코아, 커피와 함께 가격 상승폭이 높았던 작물 중 하나다.
천연고무의 대체재이자 보완재인 합성고무 수요 증가로 합성고무의 가격이 오르면서 수익성이 높아졌고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판매 증가로 18인치 대형 타이어 수요도 증가해 타이어 원료인 스티렌부타디엔고무(SBR) 소비도 덩달아 늘었다.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타이어 교체 주기가 도래한 것도 실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대 석유화학 기업 영업이익 추이. 그래픽=정다운 기자
고부가가치 제품인 NB(니트릴부타디엔)라텍스의 수출 규모도 2024년 8월 이후 최고치를 달리고 있다. NB라텍스는 의료·위생용 장갑의 핵심 원료로 비닐장갑보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화학물질에 내성이 있으며 노화방지, 알레르기 반응이 없다.
의료용 라텍스 장갑은 코로나19 특수에 힘입어 수요가 크게 증가한 바 있다. NB라텍스는 금호석유화학의 매출에서 약 40%를 차지한다. 금호석유화학은 글로벌 NB라텍스 시장점유율 1위(25%)다.
코로나 팬데믹 종식 이후 수요가 둔화했지만 라텍스 장갑의 유통기한이 보통 3~5년으로 폐기 처분되기 때문에 교체 시기가 돌아오며 수요가 늘고 있다.
NB라텍스, 관세전쟁서 반사 수혜
NB라텍스는 미·중 갈등과 그로 인한 대중국 규제 강화 속 반사이익도 기대된다. 미국이 중국산 의료 및 수술용 고무장갑에 대한 대중 관세 비율을 올해 1월부터 기존 7.5%에서 50%로 상향했고 2026년부터는 100%로 또 한번 상향할 예정이다.
이와 별개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산 전 수입품에 대해 추가 10% 보편관세를 부과한다는 입장인 만큼 말레이시아와 태국 장갑 업체들이 미국향 판매량 증가 등 반사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다.
금호석유화학은 수술용 고무장갑의 원료인 NB라텍스의 70~80%를 중국의 경쟁국인 말레이시아·태국 등에 공급하고 있다.
NB라텍스 수요 증가에 대비해 선제적 증설로 생산능력을 점차적으로 확대한 선구안도 빛을 발했다. 금호석유화학은 2008년 고부가 소재 확대를 위해 NB라텍스 사업에 진출한 후 꾸준히 투자를 진행해 생산능력을 기존 71만 톤에서 94만6000톤으로 늘렸다.
금호석유화학그룹 사옥. 사진=금호석유화학
금호석유화학은 다른 석유화학 기업들과 달리 나프타분해설비(NCC)를 직접 운영하지 않아 원가 부담이 적은 사업구조상 중국의 공급과잉으로 전 세계 석유화학 기업들이 타격을 입는 상황에서 무풍지대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원료부터 PE, ABS, 합성고무 등 다운스트림 제품까지 수직계열화 체제를 구축한 경쟁사들과 달리 NCC에서 생산되는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스티렌모노머(SM) 등을 외부 조달하기 때문에 수익성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평가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은 석유화학 장기 침체로 범용사업 비중을 낮추기 위해 설비 매각에 나섰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2023년 3월 여수 SM 공장 가동을 중단한데 이어 여수 NC 2공장 매각을 추진하고 있으나 원매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2010년 1조5000억원에 인수했던 말레이시아 자회사 LC타이탄의 인수 후보를 물색 중이나 시황 악화로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은 2024년 3월 중국 업체와 합작해 2009년부터 운영해온 일조금호금마화학유한공사 라텍스 공장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금호석유화학은 불황에 빠진 석유화학업계가 지난해 실적 부진을 이유로 대표이사를 대거 교체하는 인사 칼바람도 피해갔다. 롯데케미칼이 2024년 11월 롯데그룹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1년 만에 수장을 교체하고 미등기 임원 30%를 축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롯데는 화학군 총 13명의 최고경영자(CEO) 중 전년도에 선임된 롯데알미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LC USA 대표 등 3명을 제외한 10명을 교체했다. 앞서 한화솔루션은 지난해 7월 실적 부진에 빠진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큐셀 부문과 자회사 여천NCC 등 3개 계열사 대표를 전격 교체했다.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총괄사장. 사진=금호석유화학
수년간 이어진 경영권 분쟁도 일단락
올해 사업 전망도 밝은 편이다. 전유진 iM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관세 상향은 말레이시아·태국 장갑 업체들에 반사이익이 될 수 있다”며 “금호석유화학의 NB라텍스 판매는 말레이시아 80%, 베트남 10% 내외로 각각 이뤄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관세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고래싸움에 새우가 반사 수혜를 볼 수 있어 긍정적인 영업 여건이 될 전망”이라고 했다.
경쟁사 대비 양호한 실적을 바탕으로 3세 경영 체제도 안착되고 있다는 평가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의 장남인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총괄사장은 전기차 핵심 소재인 탄소나노튜브(CNT)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 등에 투자하며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다.
친환경 자동차 솔루션 강화, 바이오·지속가능 소재 확대, 고부가 스페셜티 제품 전환 가속화 등 3대 성장동력을 통해 매출 성장률 6%, 자기자본이익률(ROE) 10% 달성을 추진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기업가치 제고 계획도 최근 발표했다.
박 회장을 상대로 ‘조카의 난’을 일으켰던 금호석유화학 개인 최대주주(9.51%) 박철완 전 상무 측과 수년간 이어진 경영권 분쟁도 사실상 일단락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박 전 상무의 세 누나들이 금호석유화학 지분 일부를 매도해 영향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오는 3월 정기주주총회를 앞두고 박 전 상무 등 과거 주주제안을 했던 주주들의 주주제안 접수 내용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올해 주주총회에는 주주제안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