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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착취물 관련 이미지. 셔터스톡
30대 남성 화가 A씨는 전 여자친구들의 신체 사진과 성관계 영상을 3년에 걸쳐 불법 촬영하고 몰래 소지·보관한 혐의로 2020년 고소당해 재판에 넘겨졌다. 특히 고등학교 교생 실습을 나가 알게 된 피해자 B씨에 대한 범행은 B씨가 만 18세 미성년자였던 2013년부터 헤어질 때까지 3년간 지속됐다.

A씨의 범행은 2019년 피해자 C씨와의 이별 과정에서 드러났다. C씨가 함께 쓰던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챙긴 짐 속에 A씨의 USB가 우연히 흘러 들어간 것이다. 헤어지고 1년 뒤 C씨가 열어본 USB 속엔 B, C씨의 사진과 영상 백업 파일 수백 개가 담겨있었다. 두 사람은 이 중 일부를 새로운 USB에 복사해 경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A씨는 검사와 치열한 공방 끝에 1·2심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경찰의 USB 포렌식 과정에서 A씨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아 “증거가 전부 무효”라는 이유였다. 창원지법 1심과 부산고법(창원) 2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제공한 USB 사본의 ‘실질적 피압수자(소유자)’는 A씨”라며 “A씨에 대한 기본적 인권 보장이 이뤄지지 않은 위법 수집 증거”라고 봤다. 충격에 빠진 검찰과 피해자들은 대법원의 판단을 구했다.



고소 4년여 만의 대법원 판결…‘디지털 증거능력’ 한 획
대법원 전경. 뉴스1
그 판결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공개됐다. 대법원은 “증거로 제출된 USB 사본은 피해자들 것이므로 A씨를 실질적 피압수자로 볼 수 없고, 따라서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며 부산고법에 파기환송했다. 피해자들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고무줄 같은 디지털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한 중요한 판례로 남았다. 특히 대검찰청은 전국 검찰청에 “향후 수사 실무에 참고하라”는 업무 연락을 1년 새 두 차례나 돌렸다. 지난해 1월엔 ‘디지털 증거 수집할 때 주의하라’며 1·2심 무죄 판결을, 올해 1월엔 정반대의 대법원 판결을 소개했다.

‘실질적 피압수자’는 디지털 증거능력이 재판의 쟁점으로 거듭 부상하자 대법원이 2010년대 후반 들어 자체적으로 고안한 개념이다. 수사기관이 디지털 증거에 담긴 혐의를 분석할 때 포렌식 참여권, 즉 방어권을 실질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참여권이 배제된 증거는 법정에서 쓸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실질적 피압수자인가’는 검·경에게 민감한 문제다.

그러나 증거 내용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증거가 든 매체의 소유·관리자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 등 변수가 많은 탓에 대법원에서조차 서로 충돌하는 판례가 쌓이고 있다. 2021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불법 촬영 피해자가 범행을 당한 직후 피의자 휴대전화를 갖고 나와 경찰에 제출한 사안에서 ‘제3자가 제출한 피의자의 물건은 피의자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2023년 12월에도 불법 촬영 피해자가 피의자가 분실한 휴대전화를 제출한 사건에서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이번 USB 판례와는 반대로 피의자 손을 들어준 사례들이었다.



정경심 PC 때 화제…‘고무줄 판례’에 수사 혼란
2022년 1월 대법원에서 자녀 입시비리 혐의 등으로 징역 4년을 형을 확정받았던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가 2023년 9월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하고 있다. 뉴스1
실질적 피압수자의 범위가 본격적인 법조계의 화두가 건 조국 사건 때부터다. 검찰 압수수색 과정에서 동양대 직원이 임의제출한 강사휴게실 PC에 정경심씨의 입시비리 혐의를 입증할 동양대 총장 직인 파일과 상장 양식 등이 들어있었는데, 정씨 측이 2021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해 “검찰이 실질적 피압수자인 정씨의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다. 긴 공방 끝에 대법원은 2022년 1월 PC의 실질적 피압수자를 동양대로 보고 정씨 주장을 기각했다.

이른바 ‘정경심 판례’와 ‘USB 판례’는 대법원이 실질적 피압수자의 개념을 확장하지 않은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수사 과정에서 증거를 가진 피해자나 범행에 사용된 PC를 관리했던 PC방 주인, 네이버·카카오 등 디지털 정보를 관리하는 회사도 ‘피압수자’가 될 수 있는데, 누구의 참여권을 보장해야 하는지가 판례마다 다르다”며 “수사 초기부터 핵심 피의자를 특정해 포렌식에 참여시켜야 하는 등 수사의 밀행성을 감안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 불확실성이 크다”고 말했다. 예컨대 메신저 회사를 압수수색해 수백 명이 참여한 단체 대화방 증거를 얻었을 때 어디까지 포렌식에 참여시켜야 하는지 명확한 법문이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혼란에 대해 대검찰청 관계자는 “근본적으로는 무한 복제나 원격 관리 등이 가능한 디지털 증거의 특성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현행법이 따라잡지 못하는 게 원인”이라며 “실질적 피압수자의 범위에 대한 입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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