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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연애편지를 써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이메일이나 메신저가 없던 시절 편지는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우체통이 있던 그 시절. 한 청년이 좋아하는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애편지를 썼습니다. 대략 400통 정도.

편지를 받은 여성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상대자는 편지를 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편지를 배달한 집배원이었습니다. 심리학 용어인 ‘단순 노출 효과’를 설명할 때 쓰이는 에피소드입니다. 많이 보면 좋고 가까운 감정이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파리의 흉물이었던 에펠탑이 사랑받는 랜드마크가 된 ‘에펠탑 효과’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이와 달리 폭력 등 문제적 장면을 계속 접하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심리학 용어는 ‘탈감각화’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고통을 못 느끼고 삶아진다는 ‘끓는 물속 개구리 효과’도 비슷합니다. 이외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 등이 무뎌진 감각이 가져다주는 참혹함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신체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경보장치가 있어 치료가 가능합니다. 몸에 문제가 발생하면 당장 불편하니 병원을 찾아갑니다. 이와 달리 정신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기에 더 무서운 증상입니다. 어느 순간 문제적 현상과 부조리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의 몇 가지 지표를 보면 사회적 감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몇 해 전만 해도 가로수길이나 종로에 붙어 있는 ‘임대’ 안내문은 충격이었습니다. 적막한 경리단길, 이태원 메인 거리의 황량함도 낯설었습니다. 수도권 상가가 통째로 임대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가로수길과 종로의 임대 안내문은 디폴트이며, 경리단길의 스산함은 자연스럽습니다. 빈 건물을 보면 그저 ‘분양받은 사람들 힘들겠네’ 하고 지나갑니다.

자영업자 폐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폐업한 자영업자 100만 명’이란 말을 들어도 쇼킹하지 않습니다. ‘자영업은 계속 어려웠지’란 생각을 하며 무심코 스쳐 보냅니다.

청년들의 구직난에도 사회는 내성이 생긴 듯합니다. 지난 1월 고용보험 가입자 숫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근본적 질문을 들게 합니다. 29세 이하는 10만7000명 정도가 줄었습니다. 60세 이상은 14만6000명이 늘었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정부를 비판하며 난리를 쳤을 텐데 드라이하게 숫자만 보여주고 지나갑니다.

무뎌져서는 안 되지만 무뎌지고 있는 또 다른 통계는 자살입니다. 2023년 자살자는 1만4000명에 육박했습니다. 10년 내 가장 많았습니다. 이 추세는 2024년에도 지속됐습니다. 10, 20, 30대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자살률 1위 국가란 불명예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현재여서 그런 것일까, 사회는 무덤덤해 보입니다.

자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경제적 빈곤이라는 점에 많은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역사적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 자살이 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살률은 한국 경제에 울리는 많은 비상벨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년간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는 미국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스필오버 효과는 사라졌습니다. 수출이 사상 최대여도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기에 약간은 공허합니다. 가계부채는 소비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소매판매는 11분기 연속 마이너스라는 초유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도 얼어붙고 있습니다. 내수를 살릴 눈에 띄는 정부 대책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황은 그렇게 구조적으로 한국 사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무뎌진 감각의 결과, 깊은 불황과 높아지는 자살률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나 국가가 불황기를 견뎌내는 힘은 사회적 자본에 있다고 합니다. 서로 연대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 주체는 정부, 기업, 노조, 정치권 그리고 정책이 최종소비자인 국민들까지 다 포함됩니다.

자신의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최소한의 합의를 하나씩 하나씩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들은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치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마치 경전이라도 되는 양 붙들고, 상대를 적으로 돌리며 양보와 타협을 도외시한 결과는 현실에서 생생히 목격하고 있습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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