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나의 완벽한 비서>의 완벽한 비서 유은호로 분한 배우 이준혁.SBS 제공
상사의 어지러운 책상을 말끔히 정리하고, 말하기도 전에 필요한 서류를 착착 대령하는 비서. 밥 먹듯 밥을 굶는 상사를 향긋한 빵 냄새로 유혹해 끼니를 챙기게 하는 비서. 툭하면 부딪히는 상사를 위해 문을 새로 달고, 밥 먹을 땐 조용히 머리끈을 건네는 비서. 이것만으로도 ‘꿈의 비서’인데 여기에 외모와 인성까지 훌륭하다면? 사랑에 빠지지 않기 어렵지 않을까.
지난 14일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나완비>)가 최고 시청률 12%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이른바 ‘비서물’의 성역할을 뒤집으며 주목을 받은 드라마의 중심엔 주인공 은호 역의 배우 이준혁(41)이 있다. 여성 CEO 강지윤(한지민)을 보좌하는 완벽한 남자 비서 은호의 모습은 매회 화제의 장면을 만들어내며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준혁은 “마치 세상과 마음이 통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나완비> 팀이 되게 오래 고생했는데 우리 고민이 통했구나 싶어요. 드라마는 세상에 없는 걸 만드는 과정이잖아요. 어떤 믿음을 가지고 함께 만든 결과물에 사람들이 동의해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감동적이기도 하고요.”
<나완비>는 이준혁의 매력에 많은 부분 의지한 드라마다. ‘남성 상사-여성 비서의 사랑’이라는 기존 구도를 뒤엎으며 신선함을 확보했지만, 기존 로맨스 장르의 관습을 그대로 따른다. 은호의 매력이 곧 드라마의 성패와 이어지는 구조다. 방영 내내 ‘이준혁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재치 있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놓고 멋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이준혁에게도 부담이었다. 그는 거꾸로 은호를 ‘튀지 않게’ 표현하려 애썼다. “은호는 기타로 치면 베이스처럼 존재해야 했어요. 보컬처럼 앞으로 치고 나가서 ‘나 멋있어’ 해버리면 잘못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 저를 포함한 스태프 모두가 그 지점을 이해하고 공유했어요.”
튀지 않으려 했다지만 은호의 멋진 모습은 시청자들의 눈을 붙잡았다. 겸손한 이준혁조차 “되게 잘 나왔다고 느낀 장면들이 있었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이준혁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임을 강조했다.
“매스미디어의 세뇌 작용이 여전히 살아있는가 아닌가 싶어요. 현실에서 보면 판타지가 깨질 텐데···조금만 더 속아주세요. 하하.”
이준혁은 가장 어려웠던 연기로 4화 엔딩 장면을 꼽았다. 술에 취한 지윤이 잠든 은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잘생겼다, 유은호”라는 진심을 내뱉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막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처음엔 못하겠다고 했어요. ‘내 얼굴을 가지고 이런 엔딩을 한다고?’. 우리 일상에서 하기 어려운 대사잖아요. 그런데 지민씨가 연기한 걸 보고 ‘됐다’고 생각했어요. 한지민 입으로 잘생겼다고 했으니 신뢰감이 있겠다 싶었죠.”(웃음)
이준혁은 시청자들이 은호에게 유독 열광한 이유가 ‘실현 가능한 비전’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거나 나쁜 동재>가 세상의 부조리를 긁어내는 작품이라면 <나완비>는 반대로 청사진을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은호의 행동은 생각보다 간단해요.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머리를 다칠까봐 손을 대주죠.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이거예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고, 그걸 통해 좋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요.”
올해로 19년 차 배우인 이준혁은 데뷔 이래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주연한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가 호평을 받았고, 연말 개봉한 영화 <소방관>은 관객 385만명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이번 <나완비>까지 3연속 홈런이다. 들뜰 만도 한데 이준혁은 그저 겸손했다.
“제가 올해 마흔둘인데 이쯤 되니까 뭘 해도 잘 안 들떠요. 들뜨기엔 당장 암기해야 할 것(대사)이 많고요. 그래도 전처럼 당장 다음 일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고 감사해요. 저는 언제나 ‘윈터 이즈 커밍’(겨울이 오고 있다·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명대사)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웃음)
배우 이준혁.제이와이드 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