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20~30대 필리핀 여성이 정해진 시간에 집으로 찾아와, 아이를 돌봐줍니다.
이 여성은 필리핀 정부가 공인한 돌봄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전문 인력으로, 월~금 오전 8시~오후 8시 사이에 아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돌봄 시간은 하루 4시간, 6시간, 8시간 중 선택 가능합니다.
만 12세 이하 아이에 대한 식사, 목욕 지원과 의류 세탁, 기저귀 갈기, 놀아주기, 청소기로 방 치우기 등이 주 업무입니다.
시간당 이용 요금은 2025년 2월 기준 13,940원으로, 만약 주 5일·4시간씩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주일에 약 27만 원을 부담해야 합니다.
정부의 저출생 대책 일환으로 서울시에서 시행 중인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얘기입니다.
지난해 9월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98명이 육아 서비스 제공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일하고 있는데, 현재 서울에서 180여 개 가정이 이 서비스를 이용 중입니다.
정부는 그제(14일) 이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기간을 1년 연장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초 이달 말 시범사업을 마무리하고 올해 상반기 중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기존 98명에서 1,200명까지 늘리겠단 계획이었지만, 그 시점을 미룬 겁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이용자의 비용 부담, 현장 수요 문제가 있다보니 이 사업을 어떻게할지 추가적 논의를 진행 중"이라며 "이 사업을 (전국 단위로) 펼쳐야 하는 건지, 특정 지점을 겨냥해 추진해야 할지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 필리핀 가사관리사, 어떤 엄마아빠가 찾았나 봤더니…
고용노동부는 시범사업 연장을 발표하면서, 필리핀 가사관리사 98명과 이용가정 112가구를 대상으로 지난해 11월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요약해 공개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필리핀 가사관리사를 이용하고 있는지 구체적 정보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설문 결과, 필리핀 가사관리사 이용자의 98%는 30~40대 부모였습니다.
자녀 수를 보면 2명이 48.2%로 가장 많았고, 1명 34.8%, 3명 13.4% 순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의 학력인데요. 전체가 대학 졸업자였습니다.
특히 대학 졸업보다도 대학원(석사) 졸업 이상이 53%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2년제 대학을 포함한 대학 졸업자는 47%였습니다.
고학력층 부모들이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을 통해 아이돌봄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겁니다.
■ 이용자 42.8%, 부부합산 월 소득 1,200만 원↑…41%는 강남3구 거주
필리핀 가사관리사를 이용한 부모의 특징은 또 있습니다. 바로 소득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중위소득의 75~200%를 버는 가구를 중간소득가구(middle-income household)로 정의하는데요.
이를 적용해 중위소득 2배 이상을 버는 가구를 고소득층이라고 본다면, 필리핀 가사관리사 이용 가구의 42.8%가 고소득층으로 분류됐습니다.
10명 중 4명꼴로 올해 4인가구 중위소득(월 6,097,773원)의 약 2배 이상, 부부합산 월 1천200만 원 이상을 버는 걸로 조사된 겁니다.
4인가구 중위소득의 약 3배 이상, 월 1천8백만 원 이상의 소득(부부 합산)을 벌고 있단 응답도 23.2%나 됐습니다.
부부합산 월 소득이 중위소득 아래(6백만 원 미만)에 있는 가구는 8.9%에 그쳤습니다.
이용자들의 거주지, 즉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출근하는 곳을 봐도 비슷한 특징이 확인됩니다.
강남구가 19.6%로 가장 비율이 높았고, 서초구 13.4%, 성동구 11.6%, 송파구 8% 순이었습니다.
주민 소득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강남3구에 사는 이용자가 전체의 41%였습니다.
이용 가격이 민간 아이돌봄 서비스보다 낮게 책정됐고, 고소득자를 우선 선정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뭘까요?
서울시 관계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 아이돌봄서비스는 저소득층이 우선"이라며 "고소득층은 정부 지원도 없고 공공 아이돌봄 매칭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되다보니 오히려 사각지대인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고소득층에 변호사 등 일하는 여성이 많아서 아이돌봄 지원이 더 절실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일각에선 외국인 가사관리사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정책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중산층, 서민층까지 혜택을 볼 수 있는 제도를 생각하고 이 사업을 시작했다"면서 "이대로 갖고 가기보다는 보완을 해서 더 좋은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 필리핀 가사관리사에 최저임금 등 적용?…이용자 57%는 부정적
필리핀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시행 전부터 뜨거웠던 쟁점, 이들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 문제였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8월 국회 세미나에서 "이번 시범사업은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월 238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며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해외 돌봄 인력을 도입해봐야 중산층 이하 가정에는 그림의 떡"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헌법과 근로기준법,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위반 소지가 있다며 비전문취업 비자(E-9)로 입국한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에 반대했습니다.
그럼, 서비스 이용자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설문조사 결과 "외국인 가사관리사도 국내 노동자와 동일하게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 비율이 32%로 가장 높았습니다.
2순위 답변도 "그렇지 않다"(25%)여서, 법정 최저임금이나 근로시간 준수에 부정적 의견이 57%나 됐습니다.
외국인 가사관리사도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야 한단 의견은 33%에 그쳤습니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돌봄 노동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며 "우리 사회는 아직도 타인의 노동 가치에 대한 인정이 상당히 부족한 사회"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 배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고용노동부 고위 관계자는 "적어도 비전문취업 비자(E-9) 근로자 방식으로 입국한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해선, 최저임금 적용 배제해선 안 된다는 데 서울시와도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습니다.
■ 고용노동부, 전체 설문 결과는 비공개…"아이 개월 수 중요"
고용노동부는 이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도, 자료 원본인 연구용역 결과 보고서는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에도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돌봄 대상 아동의 개월 수를 조사했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정보"라고 지적했습니다.
조 연구위원은 "한국의 어린이집 이용률이 90%를 넘다보니,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서비스 수요는 어디서 오는 건지 의문이 있다"며 "만약 이용가정 중 어린이집 가기 전 단계의 아이를 가진 집이 많다면 (외국인 가사관리사는) 맞춤형 정책으로 활용도가 높아지지만, 아이 연령이 중구난방으로 분포돼 있다면 과연 이 정책이 저출생 해결의 단초라도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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