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불황 속 소비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실속 소비법을 찾아낸다. ‘실속’이 있어야 지갑이 열리는 시대다.
계속되는 불황 속에서 소비자들은 품질과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실속 소비법을 찾아내고 있다. 소셜미디어에는 ‘저렴이’ ‘보급형’ ‘대용량’이라는 해시태그(#)로 보물찾기하듯 찾아낸 가성비 제품이나 알뜰살뜰 살림법이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내 지갑 사정을 좀처럼 이해해주지 않으니 말이다.
거품 제거한 화장품, 뷰티 공식을 새로 쓰다
최근 ‘실속 소비’로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부는 분야는 화장품이다. 화장품은 생활 필수 소비재지만 ‘럭셔리’라고 불리는 유명 브랜드들이 고급 포장과 희귀 성분, 기능성을 강조하고 화려한 마케팅을 더해 높은 가격을 유지해왔다. ‘비싼 것이 피부에도 좋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흔들리고 있다.
생활 필수 소비재 화장품, 사람들은 이제 ‘고급’이 아닌 ‘실용’을 외친다.
화장품 소비 트렌드 변화의 결정적인 지점에 ‘다이소 화장품’이 있다. 1000원에서 최대 5000원까지 ‘균일가 정책’을 고수해온 아성다이소는 2022년 4월 네이처리퍼블릭의 ‘식물원’을 시작으로 브랜드 화장품 입점을 본격적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5000원짜리 화장품을 내 소중한 피부에 발라도 될까?’ 다이소 화장품을 집었다, 놓았다 망설이는 풍경은 이내 ‘품절’이라는 안내문 앞에서 못내 아쉬워하는 장면으로 전환됐다. 일부 다이소 화장품의 효능이 입소문을 타고 ‘다이소 추천템’으로 회자되며 ‘오픈런’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다이소 관계자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60여개 화장품 브랜드가 다이소에 입점해 있다. 최근에는 색조 명가로 유명한 ‘에뛰드’가 입점 소식을 알리면서 ‘뷰덕’(뷰티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아성다이소는 지난 2022년 4월 네이처리퍼블릭의 ‘식물원’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브랜드 화장품 입점을 늘렸고 현재 60여 개 화장품 브랜드가 입점해있다. 사진 다이소 홈플러스상봉점의 ‘브랜드 전용 쇼룸’
다이소 화장품 코너는 LG생활건강, 애경산업 등 전문 코스메틱 대기업과 정샘물, 조성아 등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론칭한 화장품 그리고 신생 로드숍의 제품까지 입점하며 ‘코스메틱 각축장’이 되고 있다.
“다이소 화장품인 VT 리들샷, pdrn 세럼, 메디필 랩핑 마스크. 총금액 1만1000원에 피부과 물광주사 500대 맞은 피부가 된다.” 최근 뷰티 인플루언서 ‘도로로’가 언급한 이른바 ‘물광 레시피’가 화제를 모으며 세 제품 모두 품절 사태를 빚었다. 일부 소비자들은 “지금까지 화장품에 비싼 돈 쓴 것에 배신감마저 든다”며 성토하는 분위기다.
기존 화장품 가격을 생각하면 과연 다이소 화장품이 ‘남는 장사’인지 의구심이 든다. 다이소 측은 불필요한 포장을 최소화하고 디자인을 단순화하는 것이 ‘균일가의 비결’이라고 밝힌다.
“VT 리들샷의 경우 로드숍에 입점된 제품과 주요 성분은 같고 배합 비율이 다릅니다. 균일가에 맞춰 선보이기 위해 용량을 다르게 만들거나 패키지를 최소화하는 등 노력하고 있어요.”
화장품 용기 디자인을 간소화해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면서 가성비와 품질을 다 잡은 ‘실용적인’ 화장품이 탄생된다. 사진 한국 콜마
‘다이소 추천템’ 중 하나인 ‘메디필 물광 리프팅 랩핑 마스크’를 제조하는 한국콜마는 “최근 화장품 업체들의 다이소용 화장품 개발 문의가 늘고 있다”며 “가격이 합리적이면서도 트렌드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장품의 경우 용기와 용기를 닫는 뚜껑인 캡, 용기가 담기는 상자 등 부재료의 가격이 생각보다 높아요. 화장품 용기의 디자인을 간소화해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실용적이면서도 제품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섭외하는 마케팅과 광고 비용이 빠지는 것도 화장품 가격 혁명의 요인이다. 대신 광고료 대비 젊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뷰티 인플루언서 마케팅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다이소와 더불어 ‘라방’이라고 불리는 라이브커머스가 새로운 유통 채널로 떠오른 것도 화장품 가격 거품을 빼는 데 한몫했다.
언제까지 균일가 정책을 고수할 수 있을지 다이소 측에 물었다. “10만명에게 10% 이익을 남기기보다는 100만명의 선택을 받는 것을 택했다. 원자재비 상승, 인건비 상승 등 어려운 상황이지만 좋은 상품을 만들어 ‘균일가’를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용량 위주로 파는 B2B 식자재몰은 점차 개인 회원이 늘고 있다. 용량 대비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을 ‘쟁이기’용으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면서다. 사진 푸디스트
더 저렴하게 더 실속 있게 ‘대용량’ 소비법
“유리병에 든 파스타 소스는 개봉한 후 빨리 먹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기 일쑤예요. 저는 아예 대용량 파우치에 담긴 소스를 삽니다. 지퍼백에 나눠 담은 뒤 그대로 냉동하면 오래 두고 쓰기 좋아요.”
4인 가족 김서진씨가 애용하는 파스타 소스 대용량 쟁이기 노하우다. 더는 아끼기 쉽지 않아 보였던 식료품, 생필품 장보기에도 틈새 절약 전략이 먹히고 있다. 만두, 치킨너깃 등 인기 대기업 제품을 납품하는 제조사를 찾아내 ‘대기업 유통 거품’이 빠진 동일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이다. 실속을 챙기는 고객이 늘다 보니 식당이나 단체급식 업체가 주 고객층이었던 B2B 식자재 유통 업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식자재왕몰’을 운영 중인 푸디스트는 “2024년 말 기준 전체 회원 중 약 80%가 개인회원(일반 소비자)”이라며 “2022년 대비 2024년 개인회원이 약 30% 증가했다”고 밝혔다. 고물가로 인한 가성비, 대용량 제품을 찾는 개인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판단이다. 푸디스트는 매년 증가 추세인 개인 소비자들을 위한 ‘오늘 배송 서비스’ 외에도 1인 가구를 위해 기존 대용량 상품에서 용량을 절반가량 줄인 소포장 PB 제품을 점차 늘릴 계획이라고 전했다.
송대빈 푸디스트 마트사업부장은 “고물가·고환율·고금리 3고 시대에 접어들며 B2B 유통 업체인 식자재 마트에서도 가성비가 우수한 대용량 상품을 찾는 일반 소비자가 늘고 있음을 체감한다”며 “특히 소비기한이 긴 냉동식품(돈가스, 만두 등)을 많이 찾고 있으며, 샐러드 소비가 늘면서 대용량 파우치형 드레싱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과다 재고품과 유통기한 임박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유통하는 임박상품몰에도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임박상품몰 ‘이유몰’은 2023년 대비 2024년 매출이 120% 성장해 ‘불황 중 선방’이라고 자평한다.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생필품이다. 유통기한에 비교적 덜 민감하며 쟁였다가 쓰기 좋은 욕실·주방용품, 1ℓ 이상의 대용량 상품이 인기다. 특히 오전 11시 새 상품이 업데이트되는 ‘아수라장’ 코너에는 저렴한 ‘신상’을 구매하기 위해 고객 수천명이 동시 접속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장규식 이유몰 이사는 “특히 재구매 고객이 많다”며 “한번 써보면 더는 여느 마트에서 제값 주고는 못 살 것 같다는 고객평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고가의 인기 제품 디자인을 따라한 ‘듀프(dupe)’ 상품이 ‘합리적인 소비’로 뜨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과 이즈미르 샌들 슬리퍼의 듀프 제품. 사진 월마트(WalMart) 홈페이지
젊은층이 더욱 적극적인 합리 소비
의류 소비에도 합리적인 가격대에 넓은 제품군을 선보이는 SPA(제조·유통 일원화로 합리적인 가격을 유지하는 제품) 브랜드가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다. 젊은 소비자일수록 브랜드보다 실속 소비를 우선시하고 있다. SPA 브랜드에 대한 인식도 좋다. 지난해 오픈서베이가 6개월 이내 SPA 브랜드 의류를 구매한 19~29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고객 만족도(5점 만점)를 조사한 결과 무신사 스탠다드(4.11점), 스파오(4.02점), 에잇세컨즈(4.01점) 등 국내 브랜드가 4점 이상을 받았다. ‘탑텐’ ‘스파오’ ‘에잇세컨즈’ 모두 매출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매장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실속 있는 가격으로 최신 트렌드가 가미된 옷을 살 수 있다는 점이 SPA 브랜드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해외에서는 ‘보급형’ ‘저렴이’ 개념을 넘어 고가의 인기 제품을 그대로 따라 한 ‘듀프(dupe)’ 상품이 뜨고 있다. 지난해 8월 미국 월마트가 출시한 에르메스 버킨백을 빼닮은 80달러대(약 10만원) ‘워킨백(Wirkinbag)’은 순식간에 매진됐다. 다이슨 에어랩, 룰루레몬 레깅스, 아디다스 삼바, 스탠리 텀블러 등 뷰티, 패션에서 전자제품까지 여러 제품군에서 듀프 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듀프 상품은 ‘짝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소비문화로 자리 잡으며 ‘더 적은 비용으로 고가 제품의 외형을 얻는’ 합리적인 소비의 영역이 됐다. 영상 소셜미디어인 틱톡에 “I found the perfect dupe”를 입력하면 수십만개 관련 영상이 뜬다. 인기 영상은 억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매력적인 듀프 제품을 찾고 공유하는 것이 당당한 놀이문화가 됐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이런 현상에 대해 “‘모조품(knockoff)’으로 여겨졌던 제품들이 이제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합리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고급 브랜드의 가격 정책과 가치 제안에 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 셈”이라고 분석했다. ‘비싸야 잘 팔린다’는 명품 방정식의 시대는 불황 속에서 저물어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