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점령지 인정, 우크라의 나토 가입 불허 등 큰 틀 합의
러의 세력권 인정 등 다극화 수용…미 일극 체제 저물어
러의 세력권 인정 등 다극화 수용…미 일극 체제 저물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첫 공식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 개시에 합의함으로써 그의 귀환 이후 세계 질서 변화가 가시화될지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각) 1시간30분간 통화하며 종전 협상 시작에 합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첫 공식 통화 뒤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푸틴 대통령과 길고 생산적인 통화를 했다”며 “우리는 매우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으며, 상호 방문을 포함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과 관련해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존 랫클리프 중앙정보국(CIA) 국장,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윗코프 중동 특사에게 협상을 이끌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푸틴 대통령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만나게 될 것”이라며 “이곳(미국)에 오고 내가 그곳(러시아)에 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양국 상호 방문 의사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최대 쟁점인 러시아 점령지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문제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2014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는 문제는)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일부는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도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방위 연락 그룹 회의에서 “우크라이나가 전쟁 이전의 국경을 되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역시 협상에서 비현실적인 목표”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도 통화하고는 “그(젤렌스키)는 푸틴처럼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며 “이제 이 어리석은 전쟁을 멈출 때가 됐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사우디에서 푸틴과의 회담 등 초기 협상에서 우크라이나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종전 협상이 미·러 주도로 진행될 것임을 시사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13일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며 “작업을 빨리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는 현재 (미국) 정부의 입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화에 열려 있다”고도 말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각국은 미-러의 이런 움직임을 비판했다. 안드리 시비하 우크라이나 외교부 장관은 13일 보도된 프랑스 일간 르몽드와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7개국은 12일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협상의 일부여야만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통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발발한 지 3년 만에 큰 전기를 맞았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미국 대외 정책의 본격적 변화를 상징한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미국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고 우크라이나 문제를 유럽에 넘기겠다고 했는데, 취임 뒤 실행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와 그 동의어인 미국 일극 체제를 더 이상 고수할 의지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달 30일 폭스뉴스와의 회견에서 “세계에 단순히 일극 세력만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며 “다극화 세계로, 세계의 다른 곳들에서 여러 열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폐쇄 조처 역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적 가치의 전파를 위해 인도적 지원이나 이념적 지원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신호다.
미·러 정상은 이날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의 큰 틀을 잡았다.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미·러 주도의 협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인정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는 종전 이후 우크라이나 문제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브뤼셀에서 “유럽은 우크라이나 방위를 위해 더 많은 군사적·재정적 책임을 져야 한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파병하지 않을 것이며, 향후 군사 및 비군사 지원의 압도적 비중을 유럽이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유럽이 우크라이나 방위 및 유럽 군비 확충에 향후 10년 동안 3조1천억달러(약 4500조원)가 소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종전을 고리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해, 중국과의 대결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것을 노릴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 전략적 동맹을 부활시킨 북한과의 협상에도 지렛대가 생길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들에도 관세를 추가하고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와 파나마 소유인 파나마운하를 차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다극화 시대 징후로 읽을 여지가 있다. 미국이 그린란드나 파나마운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아메리카 대륙 우선 정책을 부활시킨 것이고, 동맹에 대한 관세 추가는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비용을 치를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세계의 문제에서 퇴각하며 비용은 동맹에 떠넘기려는 행보를 더욱 뚜렷이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