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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운임제 폐지 3년]
<하>약속 지키지 않은 정부
운수사들, 일감 쥐고 여러 금전 요구 횡행
'화물기사 최저임금' 안전운임제 폐지 후
당정 '화물 운송산업 정상화' 발표했지만
국회 논의 지지부진, 시행령 개정도 늦어

편집자주

안전운임제는 '화물기사 최저임금'으로 불린다. 기사들에게 적정 수준의 운송료을 보장해 과로와 과적, 과속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2020년 컨테이너와 시멘트 운송 화물차에 우선 도입됐으나, 2022년 12월 31일 일몰제가 적용돼 폐지됐다. 안전운임제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총파업에 나섰던 화물연대도 정부의 폐지 정책을 막지 못했다. 안전운임제 폐지 3년째 접어든 현재, 화물차 기사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2021년 11월 경기도 한 주유소에 한 화물기사가 화물차량을 주차해놓고 대기하고 있다. 사진과 기사는 직접적 관련은 없음. 연합뉴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임님, 질문이 있는데요. 방금 안성에서 화성까지 화물 운송은 얼마짜리인가요?"(화물기사 박명환)

"건 바이 건으로 운임은 공유 안 해드려요. 처음 들어오실 때 보낸 운행 수칙 보면 나와 있습니다. 월말 지나면 경리과에서 한 달 치 운임 알려줄 겁니다."(운송사 직원)

지난 1월 초 새벽 4시 30분을 넘긴 시간. 일과를 마친 '신참내기' 화물기사 박명환(가명·47)씨는 운송사 직원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방금 전 본인이 옮긴 화물 운임, 즉 자신의 '일당'이 비밀이라는 거였다. 정작 운송사에서 일감을 배정할 때는
'특별한 사유 없이 배차 거부는 안 된다'며 엄
포를 놓았던 게
떠올랐다.

대행료 뜯기고 위약금 협박받는 새내기 화물기사



중소 제조업체에 다녔던 그는 지난해 연말 회사 부도로 일자리를 잃자,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 화물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주 6일 일하면 최소 매달 400만~500만 원은 벌고, 더 열심히 일하면 1,000만 원도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운송사 설명이었다.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 및 확대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나섰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 관계자들이 2022년 12월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집회를 연 뒤 행진하고 있다. 노란색 '화물 운송용 번호판'은 지입료 갑질의 상징이다. 연합뉴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화물차 값과 취등록세 등 7,000만 원에, 근거 없는 지입차 등록 대행료 명목으로 운송사가 요구한 550만 원까지 거금을 투입
했다. 매달 26만 원씩 나가는 지입차량비용, 이른바 넘버 값은 별도였다. 운송 일을 하려면 노란색 '영업용 번호판'이 필요한데, 신규 허가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물기사는
번호판을 가진 운송사에 대여료(지입료)
를 내며 일하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말 화물기사 92.5%가 이 같은 지입차주였다.

정작 명환씨의 앞에 닥친 삶은 제대로 된 식사도 수면도 어렵고, 몸을 갈아 넣는 '장시간 노동'의 굴레였다. 새벽 시간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순간 덮치는 졸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운송사 직원과 대화하던 새벽, 명환씨는
20시간째 근무 중
이었다. 전날
아침 9시 집에서 출발해 오전 중 용인에서 안성으로, 오후에는 평택에서 이천으로 달렸고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시 밤 10시 안성에서 화성까지 달렸다. 기어이 코피까지 터졌다.

근무 일주일 만에 체력이 한계에 부딪힌 명환씨가 운송사에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고 말하자, 회사는 "일하기로 해놓고 그만둔다니 위약금을 내라"며 협박했다. 명환씨는 근거 없이 뜯긴 대행료라도 돌려받고 싶지만,
일주일 일한 배송료도 받지 못한 채 위약금 협박에 전전긍긍
하고 있다.

화물 트럭들이 주차장에 정차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명환씨가 겪은 일은 전형적인 운송사 '지입제 갑질' 사례다. 가지각색 갑질은 베테랑도 피하기 어렵다. 18년 차 화물기사인 김진영(50)씨는 "무슨 현대판 노예도 아니고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아서 너도나도 화물 일을 하려고 하면 사무실(운송사)이
'번호판 값 500만 원 더 주라, 안 주면 번호판 다른 기사에게 넘기겠다'
며 갑질을 한다"고 토로했다. "물건(일감)을 받을 때도 금액이 낮다고 거절하면, 다음 날 배차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받기 싫어도 억지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토부 2년 전 '갑질 금지' 계획 밝혔지만···



정부는 2년 전 '지입제 갑질' 근절을 선언했다. 국토교통부는 안전운임제를 폐지하는 대신 2023년 2월 당·정협의를 통해, 지입제 개혁과 표준운임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화물 운송산업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법개정이 늦어지자, 지난해 1월 19일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시행규칙을 먼저 개정했다.
'번호판 사용료 요구 등 부당한 금전을 요구하고 받는 행위
등을 원천 금지하겠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위반 시 과태료 500만 원에, 감차(운송사가 가진 영업용 화물차 대수를 줄이는 것) 처분까지 하겠다고 했다. 운송사가 화물기사에게 과적을 요구하거나, 넘버 값만 받고 일감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 등도 규제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당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가운데)이 국회에서 열린 화물운송산업 정상화 방안 당정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그렇다면 이후 현장에서 바뀐 게 있을까. 한국일보가 만난 25년 경력의 화물기사 이성철(54)씨는 코웃음을 쳤다.
"정부가 번호판 장사를 못하게 한다는데 현장은 그대로예요. 가짜 번호판도 어마어마하고요.
똑같은 번호판이 전국 곳곳에서 돌아다니고, 전산에서 확인 안 되는 번호판도 있습니다."

'체감상 바뀐 게 전혀 없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일보 취재 결과 국토부가 시행령 등
개정 계획을 밝힌 게 지난해 1월인데 실제 개정이 완료된 것은 12월이며, 바뀐 규정이 시행된 건 불과 지난달
17일부터
다. 화물기사의 '최저임금'을 보장해주는 안전운임제가 2022년 연말 일몰돼 사라진 이후, 2년여 동안 실질적 후속 조치가 없어 화물기사의 노동 환경이 악화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그래픽= 송정근 기자


정부는 안전운임제 폐기 이후 화물기사들의 소득 불안정이 커졌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해 "표준운임 가이드라인을 상반기 중 공표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안전운임제와 달리 강제성은 없지만, 입법 공백을 우선 최소화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해를 넘긴 2월 현재까지 이마저도 감감무소식
이다. 여야가 발의한 안전운임제, 표준운임제 관련 법안이 6개가 되는 상황에서 국토부가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는 게 부담이 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토부 관계자는 "국회 논의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운임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경우 차주(화물기사)나 시장에 오히려 혼란이 가중될 수 있어 발표 시점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갑질 단속 역량 부족한 구청, 현장은 무법지대

화물기사들에게 '최저임금제도'와 같았던 안전운임제는 시멘트와 컨테이너 화물차에 3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 이후 2022년 연말 종료됐다.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와 '적용 차량 확대'를 요구하며 그해 말 총파업을 벌였지만, 정부의 '엄정 대응 기조' 아래 결국 파업 16일 만인 2022년 12월 9일 파업을 접고 현장 복귀했다. 사진은 총파업 종료 사흘째인 12일 경기도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ICD)에서 화물차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늦었지만 지난달부터 개정된 시행령·시행규칙이 시행 중이니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현실을 보면 낙관할 여지가 별로 없다. 관련 법령 개정은 국토부 몫이지만, 실제 개정 이후 '갑질 운송사'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은 구청 등 각 지역 기초지자체 일이다. 문제는
구청은 인력이 부족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는 것도 드물다는 점
이다.

화물차가 자주 오가는 한 항구 도시 구청 관계자는 "국토부가 번호판 사용료 수취 등을 단속하고 점검하라고 말은 하지만, 지입제도 자체가 양자 간 계약인데
어디서부터 불법적이고 어디서부터 합법적인 것인지 명확하고 상세한 지침도 없다
"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번 개정 이후 국토부는 별도 매뉴얼은 배포한 바 없고, 공문만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구청 관계자는 "간혹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서 신고가 들어오면 점검은 하지만, 운수사로부터 계좌 이력 등을 받기도 어려워 정기적 단속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해당 구청에서는 역내 화물 관련 업무를 2명이 전담한다.

전국에서 화물차 등록 대수가 손꼽히는 한 지역 구청 운수팀장은 "정기적으로 시와 합동 점검을 하기는 하지만 업무량이 워낙 많다 보니 선제적으로 단속을 하기는 어렵고 들어오는 신고 위주로 처분한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체감상 분기에 한 건 정도 신고가 들어오는데, 단독 신고는 거의 없고 보통 한 운송사의 화물기사 여러 명이 참다못해 집단으로 신고하는 식"이라고 귀띔했다.

화물연대 측 설명도 비슷하다. 최이연 화물연대 교육국장은 "현장에서 운송사 갑질은 주로 화물기사 개인이 민사소송으로 해결하거나 노조 도움을 받아 알아보는 경우가 많다"며 "2023년에도 국토부가 '지입제 피해 집중 신고기간'을 운영했지만 이후 전혀 후속 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2022년 연말 안전운임제 폐기 이후 후속 법 개정은 늦어지고, 정부·지자체의 단속 의지도 부족한 상황에 화물기사들은 '무법지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성철씨는
"우리(화물기사)들은 노동자 지위도 아니고, 자영업자도 아니고 항상 을 중의 을로 무법천지에서 살았다"
며 "안전운임제가 생긴 이후에는 운송비가 정해져 있다 보니 싸울 일도 없고, 갑을관계도 덜했는데 요즘에는 법이 없어지니 질서가 다시 깨지고 있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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