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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북한에 납치됐던 정보사 블랙 요원의 증언



2화. “총살로 날 처리해 주십시오”


이중스파이. 국군정보사 소속 대북공작관 정구왕 중령은 운명의 기로에 섰다. 1998년 3월 13일 중국 단둥(丹東)에서 신분을 숨긴 채 흑색(비밀)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다 북한에 납치된 정구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북한을 살아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지만 24시간 철저히 감시당하는 처지에서 암담했다.

그렇다고 조국과 가족을 등진 반역자가 되어 북한에 눌러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중스파이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짜 변절을 제안하고, 북한이 이를 덥석 물면 가능한 절박한 도박이었다.

역용(逆用)공작. 적의 스파이를 포섭해 우리 편을 돕는 이중스파이로 만드는 활동이다. 적의 기밀을 빼내거나 역(逆)정보를 흘려 혼란시키는 데 유용하다. 북한은 정구왕을 역용공작에 활용하려는 속셈이 있는 듯했다.



이중스파이와 역용공작의 거래
정구왕의 이중스파이 제안과 북한의 역용공작 투입은 서로 이해타산이 맞는 거래였다. 정구왕으로서는 이중스파이로 위장하는 것만이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북한으로선 한국 정보기관에 이중스파이를 심어 놓는다면 중국 내 정보사 공작원의 신상이나 북한 내에 심어 놓은 휴민트(인간정보)를 색출할 수 있었다.
대북 공작관이던 정구왕이 지난 12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사무실 근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의 이마 중간에 권총 손잡이로 찍힌 U자 형태 함몰 자국이 보인다. 흑백 사진으로 찍으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전민규 기자

그래서인지 북한은 처음부터 정구왕을 납치했지만 예상치 않은 ‘호의’를 베풀었다. 처형은커녕 고문이나 구타 등 가혹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전향을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았고, 적극적으로 세뇌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 나를 남한으로 돌려보내주라. 당신들을 위해서 일하겠다. 나도 장군으로 승진도 하고 성공하고 싶다. 당신들이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라. "
피랍 직후 정구왕은 이 같은 미끼를 던져 놓고 북한의 반응을 기다렸다. 답이 없었다. 평양 인민군 병원에서 3주간 머리와 얼굴 등에 상처 봉합 수술과 치료를 받은 뒤 어은 군인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묵묵부답이었다.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북한 보위부 산하 반탐(反探·대간첩 업무) 조직의 본격적인 신문이 시작됐다.

정구왕이 포섭한 공작원과 포섭을 지원한 북한 인물 정보, 한국 군사시설에 관한 취조가 이어졌다. 반탐 조직의 책임자는 ‘과장’으로 불렸다. 특수훈련으로 단련된 50대의 근육질이었다. 매일 저녁 그와 10분 정도의 취조가 계속됐다.

정신적인 고통은 더 심해졌다. “미인계의 덫에 걸린 개인의 일탈과 비리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게 남한 정보사의 분위기”라는 반탐과장의 전언을 다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랍 한 달이 지나도록 자신에 대한 석방이나 구조 노력이 들려오지 않았다. 절망감과 배신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끓어올랐다.

창밖으로 목련에서 꽃망울이 터져 나올 때였다. ‘부장’이란 사람이 방문했다. 카키색 인민복 차림인 왜소한 노인이었다. “내가 65살인데, 6‧25전쟁 전 38선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당시 남조선 병사들이 초소를 이탈해 ‘배고파 죽겠다’고 해 참 많이도 먹여 보냈다”고 했다. 금테 안경 뒤로 보이는 눈빛이 살아 있었다. 정구왕의 전향 의사를 떠보려는 듯 말을 이었다.

" 당신도 남조선 사회에서 노동자 집안 출신이고, 그 사회에 적응하고 살기 위해 군에도 간 것인데 굳이 당신만 탓할 일인가? 우린 당신을 탓하지 않는다. 민족 통일은 멀지 않았다. 우린 그 뜨거운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산다. 이게 우리 인민의 생각이다.(반탐부장) "
" 도와주시오. 군인으로 마지막 가는 길인 만큼 명예롭게 보내주시오. 총살로 날 처리해 주시오.(정구왕) "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통일은 멀지 않았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시라”며 공허한 말만 남기고 부장은 돌아갔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으니 절망적인 나날이었다. 유일한 낙이 작은 앞마당을 걷는 일이었다. 그래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야겠다는 집념은 더 강해졌다.

" 세상 사람들아, 절망이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
홀로 희망을 주입했다. 앞마당 산책과 북한이 준 책 읽기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1992~98년 출간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혁명 소설 등이었다. 하루는 떡이 들어왔다.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생일 선물이었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3주년인 1997년부터 이날을 ‘태양절’이라고 불렀다.
정구왕(오른쪽)이 중국 현지 협조자(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중국 동포인 그는 베이징대를 나와 현지 지방 도시에서 일한 관료 출신이다. 사진 정구왕 제공
불교 신자인 정구왕은 기도했다.

" 자비하신 부처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스스로 쌓은 업보에 어리석은 후회로 다시 무릎 꿇고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내 의지대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갈 수만 있다면 나갈 것이며 그때가 오면 주저함 없는 용기를 주십시오. "
어은 군인병원에서 2주 정도 머무른 뒤 평양 보통강 주변의 건물로 또 이동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관리하는 평양 외곽의 선물배급소였다. 북한 내부의 스파이로부터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고른 것으로 보였다. 김대중(DJ) 정부 초기, 평양에는 정구왕 외에도 다양한 남한 공작원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영희 디자이너
이곳에서도 신문은 이어졌다. ①공작원 포섭 과정, 북한과 중국 내 협조자 ②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오가는 운전기사 포섭 임무 추진 과정 ③구체적인 가족 관계 ④정보사와 한미합동공작팀 사무실 위치와 내부 배치도 ⑤북한에서 강원도 철원을 거쳐 서울까지 이어지는 43번 국도의 대전차 장애물과 포병대대 현황 ⑥정보사 공작여단 편제 ⑦다른 공작관 사업 ⑧초군반‧고군반‧육대 등 한국 군 교육제도 ⑨서울 서초구 우면산 미사일 기지 ⑩서울 시내 지하철의 방공호 역할 등에 대해 캐물었다.

운전기사 포섭과 관련된 정보사 지령은 공작 사항과 인물 관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납치 때 북한이 탈취한 자신의 수첩에 적힌 메모가 있어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운전기사 포섭 외에 정보사의 추가 지령은 없었다”고 끊으려 했다.


(계속)

“정 동무, 나를 청맹과니로 아는가.” 반탐과장이 고문 협박을 꺼냈습니다.
정구왕과 두 사람 사이의 수싸움이 계속됐습니다.
북한에서 벌어진 더 많은 사건,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1387


“북한, 25년 전 날 납치했다” 전설의 블랙요원이 나타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9673

스파이 본능에 만난 리계향…‘답정너 수사’ 모멸 준 수사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9669

北 탈출에 “사우나서 보자”…정보사 접선지에 숨은 비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6133

위조여권 평양 탈출극 짰다…정구왕 풀어준 북한의 속셈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44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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