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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개혁’의 피해자들
2022년 5월6일 서울중앙지검 앞에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현수막이 걸려 있다(위 사진). 같은 해 4월22일 국회에서 당시 박병석 국회의장(가운데)과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과 관련한 중재안에 합의한 뒤 촬영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국회사진기자단


이의신청권 폐지로 고발인 입 막아

경찰이 불송치 결정하면 그걸로 끝


수사 지연으로 ‘장기 사건’도 증가

“4년째 전국 빙빙 도는 사건도 있어”

부담 는 경찰, 진정으로 유도하기도


전문가 “시민 위한 개혁 아니었다”


“경찰에서 결국 불송치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이젠 더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 같아요.”

지난달 31일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가 김인규씨(48)와 통화하며 한숨을 쉬었다. 별말 없이 “고맙다”며 전화를 끊은 김씨는 닷새 뒤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2019년 충남 논산시 백제종합병원에 입원한 어머니가 숨지자 ‘백제병원 피해자 모임’ 대표를 맡아 병원의 여러 비리 의혹을 공익 신고했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최 변호사에게 수집한 증거 자료가 담긴 이동식디스크(USB)를 보냈다. 김씨는 병원 측과 오랜 소송전을 벌이며 건강이 나빠졌다.

김씨 생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조사를 거부한 백제병원을 경찰에 고발했다. 경찰은 2024년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지만 검찰이 반려하자 지난달 사건을 불송치 결정했다. 건보공단도 사건 조사를 종결 처리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상 고발인은 경찰의 불송치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22년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하겠다며 검찰청법·형사소송법을 개정한 결과 고발인 이의신청권이 폐지됐다. 최 변호사는 “수사권 개혁은 국민의 억울함을 풀고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도록 이뤄져야 하는데 ‘검찰의 힘을 빼겠다’는 관점으로만 접근했다”며 “형사사법제도가 이상하게 변해버려 김씨 같은 일반 시민에게는 안 하느니만 못한 개혁이 됐다”고 말했다.

고발인 ‘입’ 막은 수사권 조정



2022년 민주당이 주도해 법을 개정할 때 ‘고발인 이의신청권 폐지’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혔다. 과거에는 경찰이 넘긴 사건을 검찰이 불기소하면 고발인이 검찰에 항고·재항고를, 법원에 재정신청을 할 수 있었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 자체 불송치 종결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고발인이 불송치에 이의를 제기할 방법까지 막은 것이다. 법안 초안에 있던 내용도 아니었다.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 처리 직전 ‘정치적 고발 남용을 막겠다’며 끼워넣은 조항이었다. 고발인 이의신청권 폐지는 공익신고자와 사회적 약자의 발목을 잡았다. 부패범죄, 환경범죄, 마약범죄 등과 내부고발 사건은 당사자가 신원 노출을 꺼려 제3자인 기관·단체가 고발하는 경우가 많다.

발달장애인도 피해를 직접 고소하기 어려워 제3자의 고발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 산하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장애인 학대 피해자를 대신해 경찰에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 지적장애인 A씨는 가해자 가게에서 일한 급여를 받지 못하고 성추행까지 당했다. B씨는 10년 동안 장애인시설에서 함께 생활한 활동보조인에게 신체적·정서적 학대를 당했다. C씨가 휴대전화 앱을 통해 만난 가해자는 돈을 수차례 빌리고 잠적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피해자 대신 고발했지만 경찰이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불송치해 종결됐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보건복지부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고발인 이의신청권이 폐지된 2022년 9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2년 동안 경찰은 지원 기관이 발달장애인을 대신해 고발한 201개 사건 가운데 106건만 검찰에 송치했다.

전체 범죄 고발 사건을 봐도 경찰의 불송치율은 2022년 38.2%, 2023년 42.4%, 2024년 47.5%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이의신청권이 폐지된 이후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서도 고발을 주저하는 상황”이라며 “자기 입장을 스스로 주장하기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경우 제3자의 고발이 억울함을 밝힐 유일한 수단인데 이의신청을 막아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세월아 네월아, 검경 ‘핑퐁’

한신대는 2023년 11월 학교 어학당에 다니던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22명을 버스에 태워 강제 출국시켰다. 학생들이 ‘사증(비자) 발급 전 현지에서 3개월 이상 한국계 통장 잔액 1000만원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체류조건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학생들이 체류할 수 있었던 건 한신대로부터 접대를 받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장이 법무부 지침을 어기고 비자 발급 관련 서류를 내줬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문제가 드러나자 한신대는 통장 잔액을 유지한 일부 학생들까지 모두 출국시켰다.

경찰은 지난해 5월 한신대 관계자들을 약취유인 등의 혐의로, 출입국관리소장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경찰에 보완 수사를 요구하며 사건을 돌려보낸 뒤 다시 이를 넘겨받았지만 아직까지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피해 학생들은 한신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려 했지만, 검찰 처분이 나오지 않아 마냥 기다리는 상태다.

수사 지연 문제는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직접 수사가 제한되고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이 폐지되면서 심화했다. 검찰과 나눠 가졌던 사건들이 경찰로 몰렸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검찰이 배당받은 사건을 직접 수사하지 않고 경찰에 보내거나, 경찰이 송치한 사건을 보완 수사를 요구하며 돌려보내기도 한다. 검찰과 경찰이 서로 사건을 떠넘기고, 경찰에 사건이 쌓여 수사가 지연되는 구조다. 국가통계를 보면 전체 경찰 사건 중에서 6개월을 초과해 처리한 ‘장기 사건’ 비율은 2019년 5.1%, 2020년 6.3%, 2021년 9.5%, 2022년 13.9%, 2023년 11.7%로 증가 추세다. 특히 사기·횡령·배임 등 경제범죄는 민생 사건임에도 내용이 복잡해 지연 문제가 심각하다. 경제범죄의 장기 사건 비율을 보면 2023년(사기 28.0%, 횡령 17.2%, 배임 50.6%)이 수사권 조정 직전 시기인 2020년(사기 11.8%, 횡령 8.8%, 배임 20.5%)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

신민영 법무법인 호암 변호사는 “경찰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사건을 받고, 검찰은 주인 의식이 없으니 ‘핑퐁’하면서 시간만 보내는 게 일반화됐다”며 “부산 갔다가, 강남 갔다가, 사건 이송과 보완 수사를 거듭하면서 4년째 전국을 빙글빙글 도는 사건도 있다”고 말했다. D차장검사는 “한밤중에도 검찰청 창문 불빛이 훤했다는 건 옛날 얘기”라며 “형사부가 일감이 줄어 ‘칼퇴근’할 수 있는 ‘웰빙 부서’가 됐다”고 말했다.

고소·고발 접수 안 하는 경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연 티켓을 사려다 사기를 당한 E씨는 상대를 고소하려고 경찰서를 방문했다. 경찰 안내에 따라 진정서를 써서 냈다. 이후 E씨는 변호사로부터 “진정서를 고소장으로 변경해 접수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담당 경찰은 “진정이나 고소나 별다를 것이 없으니 그냥 두면 된다”며 귀찮아했다.

진정과 고소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경찰 수사규칙에 따르면 고소·고발 사건은 3개월 내 수사를 마쳐야 하는 반면, 진정 사건은 내사로 진행돼 조사 없이 자체 종결 처리가 가능하다. 경찰이 소액 사기처럼 실적거리가 되지 않는 사건은 고소·고발장을 받지 않고 진정서 접수를 유도한다는 지적이 많다.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사건을 골라 받는다는 민원이 빗발치자 경찰은 2023년 모든 고소·고발장을 일단 접수하도록 수사규칙을 개정했다. 다만 이때 ‘본인의 진의에 의한 것인지 여부가 확인되는 않는 경우’ 등 고소·고발을 진정 사건으로 수리할 수 있는 사유를 넓혔다. 고소·고발 사건 과중에 시달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경찰통계연보를 보면 경찰이 접수한 고소·고발 사건은 수사권 조정 직전인 2020년 34만9248건에서 2023년 48만4865건으로 폭증했다.

채다은 법무법인 한중 변호사는 “수사권 조정 이후 검찰이 돌려보낸 사건이 경찰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며 “경찰이 계속 주소를 물어보면서 ‘다른 경찰서에 고소·고발장을 접수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기서 ‘나오라’, 저기서 ‘나오라’

12·3 비상계엄 사태 수사 과정에선 ‘중복 수사’ 문제가 불거졌다. 군 관계자 F씨는 비상계엄 사태의 핵심 인물이 아닌데도 검찰,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서 모두 6차례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검찰에 3회, 경찰에 2회, 공수처에 1회 불려가 짧게는 7시간, 길게는 15시간 동안 질문에 시달렸다. 수사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수사를 벌이면서도 수사기록은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F씨는 “심한 스트레스에 일상이 다 깨졌다. 저기서 했던 얘기를 여기서 똑같이 다시 해야 하냐고 물어봤는데 ‘우린 자료가 없으니까 해야 한다’더라. 많이 답답하고 피가 말랐다”고 말했다.

공수처 설립과 검경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중복 수사로 인한 수사 효율 저하와 피의자·참고인 인권 침해 우려는 이미 제기됐다.

공수처법에 공수처가 검경으로부터 사건을 가져올 수 있는 이첩요청권을 명시한 이유는 중복 수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비상계엄 수사에서 이첩요청권은 오히려 세 수사기관이 경쟁하며 중복 수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사기관이 난립하면서 중복 수사라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일반인은 자기 사건이 어디 있는지 헤매는 상황”이라며 “분명한 사실은 일반 시민을 위한 수사권 개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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