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의 올해 첫 전원위원회가 열린 지난달 13일,
인권위 직원들이 안창호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들의 사퇴를 요구하며 길을 막아섰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서 윤석열 대통령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안건이 회의에 상정되자 직원들이 반발하고 나선 겁니다.
■ 국가적 위기에 '대통령 방어권' 보장하라?
김용원 인권위 상임위원 등 5명은 회의를 앞두고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이라는 이름의 긴급 안건을 제출했습니다.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심리 시, 피청구인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할 것"
안건의 핵심 내용은 '윤석열 대통령의 방어권을 보장할 것'과 '한덕수 국무총리의 탄핵소추안을 철회할 것'이었고, 이들이 주장한 국가적 위기는 '비상계엄'이 아닌 '국회의 국헌 문란', 그리고 '계엄 선포 관련자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영장 발부'였습니다.
김용원 위원은 '안건 제출 취지를 설명하겠다'면서 기자회견까지 열고 "수사기관의 현직 대통령 체포 시도가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국가적 위기는 없었다고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전현직 인권위원들과 인권위 직원들은 "위헌적 계엄 선포와 포고령에는 입을 다물고, 내란범을 비호한다"고 거세게 비판했고, 안건 상정 권한이 있는 안창호 인권위원장에게 "상정만은 막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출된 안건은 위원장의 결재를 거쳐야 회의에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한 인권위 관계자는 "여태까지는 인권위 설립 취지에 부합하지 않아 논의되어서는 안 되는 사안이나 숙의를 거치지 않은 안건이 제출되면 위원장이 더 보완하라며 회의에 바로 상정하지는 않았다"면서 "이번 안건에는 위원장의 이 같은 조치가 없었다"며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인권위 내부망에도 "간부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일부 인권위원들이 구성원들을 내란 공범으로 내몬다"는 비판글이 올라올 정도로 내부 반발이 컸습니다.
결국 회의 당일 복도를 가득 채운 직원들에게 가로막혀 일부 위원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회의는 두 차례 미뤄졌습니다.
■ "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윤 대통령 주장 빼다박아
오는 10일 열릴 2025년 제3차 전원위원회를 앞두고 같은 이름의 안건이 다시 제출됐습니다.
기존 제출인 5명 중 강정혜 위원이 안건 제출을 철회하면서 김용원 위원 등 4명이 제출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한 달 전 제출된 안건에는 없던 문장들이 추가됐습니다.
"비상계엄 선포는 고도의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통치행위에 속한다"
"헌법재판소는 계엄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통치 행위'라고 주장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주장을 빼다 박은 듯한 내용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자체를 대놓고 부정한 겁니다.
이에 대해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반인이 보더라도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갖추지 못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명백한 경우인 데다, 계엄 포고령 제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 침해하기 때문에 헌법재판소 판례에 따르더라도 심사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반박했습니다.
김용원 위원이 전두환, 노태우 재판으로 이미 수십 년 전 정립된 개념을 무시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핵심적 혐의사실인 계엄 선포에 관해 증거 인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내용도 더해졌는데, 헌법학자들은 해당 안건이 "법적인 의미보다 정치적인 의미가 더 크다"면서 "인권위가 정치적인 선동을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 '헌법재판소 두들겨 부숴야 한다'는 인권위원
김 위원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관급 공무원 신분인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내란 선동' 혐의로 고발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에게 무료 변론을 해 주겠다고 자신의 SNS에 쓴 겁니다.
전 씨는 지난 1일 한 집회에서 "국민들이 헌재를 휩쓸 것이고, 그 모든 책임은 불의한 재판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폭동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가 고발당했는데요. 김 위원은 이런 전 씨에게 "죄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어 경찰이 오라 해도 갈 필요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뜻을 거슬러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법재판소를 두들겨 부숴 흔적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한다"며 헌재를 대놓고 압박했는데요.
국민의 기본권, 약자의 인권을 우선시해야 할 인권위원이 공권력을 무시하라고 조언하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만을 위해 헌법기관을 공격하라고 선동하기까지 한 겁니다.
이같은 주장의 취지를 묻기 위해 김 위원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김 위원은 '두들겨 부순다'는 표현은 "헌법 개정을 통해 얼마든지 헌재를 폐지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서,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서부지법 폭동으로 사법기관을 향한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만큼, 김 위원의 설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명숙 활동가는 "서부지법 사태를 이미 봤기 때문에 김 위원의 말을 표현의 자유나 상징적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게 됐다"면서 "혐오와 폭력 선동이 어떻게 표현의 자유냐"고 꼬집었습니다.
서부지법 사태에 대한 김 위원의 해석도 문제였습니다.
김 위원은 '서부지법 폭동으로 두들겨 부순다는 표현이 물리적 폭력을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는 취재진의 말에 "폭동이 맞는지는 의문"이라고 운을 띄우며 말을 이어갔는데요.
지난달 인권위 직원들이 안건 상정을 저지하려 회의실 입구를 막아선 것을 두고서는 "인권위가 물리적인 공격으로 전원위를 개최하지 못한 것이나 서부지법에서 영장 발부에 대한 항의 표시로 기물 손괴 등이 발생한 건 구조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면서 두 사안이 유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극우 유튜브에서나 볼 법한 발언이 인권위원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겁니다. 이 때문에 김 위원이 '인권위 상임위원'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입니다.
■ 인권위 독립성 위한 규칙, '무소불위' 인권위원에 악용
인권위원 신분으로 이런 정치 선동 발언을 해도 별다른 제재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김 위원은 차관급 공무원으로, 국가공무원법을 적용받는데요. 현행법상 공무원은 품위 유지의 의무가 있고, 정치 활동이 금지됩니다.
국회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이 인사혁신처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가공무원법에는 '품위 손상 행위'나 '정치 활동'의 기준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위반 사항에 대해서는 판례를 바탕으로 '건전한 사회적 통념'이나 '행위의 주체, 시기, 목적' 등을 고려해 사안을 판단합니다.
이승우 변호사는 "김 위원의 발언은 자칫 헌법상 독립기관인 헌법재판소에 대한 폭력적 파괴를 선동하는 내용으로 비춰질 수 있다"면서 "이는 법치주의와 헌법 질서를 훼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인권위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에 중대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권위를 비롯한 공직사회와 공무원의 품위를 심각하게 손상시킨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은 "김용원 위원은 마치 윤석열 변호인단에 합류하기 위해 극우세력과 내란 선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헌재를 부정하고, 내란과 정치 선동을 이어가는 김용원 위원은 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법조인으로서도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인권위 상임위원이 품위 손상 행위나 정치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징계할 방법은 없습니다.
김 위원 같은 정무직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상 징계 관련 규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인데요. 국가인권위원회가 독립 기관인 만큼 상임위원들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직을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설정된 규칙입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정부에 쓴 인권위원을 함부로 징계할 수 없도록 고도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징계 절차를 만들지 않은 건데, 이를 사실상 악용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윤석열 방어권 보장' 안건 상정될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김 위원이 제출한 안건을 상정하거나 반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안 위원장이 안건을 전원위원회에 상정한다면 재적 인권위원 11명 중 과반인 6명 이상이 찬성했을 때 안건이 가결됩니다.
해당 안건을 함께 발의했던 '원명스님' 김종민 위원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고, 강정혜 위원도 안건 제출 동의를 철회한 상황이라 논의를 거치더라도 가결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의견이 많은데요.
다만 인권위 직원과 전현직 위원들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 원칙에 맞지 않는 안건이 회의에 상정되는 것 자체가 불명예"라는 반응입니다.
안 위원장은 김 위원의 안건 상정 여부나 페이스북 메시지 등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관련 인권침해 사안 직권조사'는 내려놓은 인권위가 '대통령 방어권 보장'에는 나설지, 국민보다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의 인권을 우선시할지는 10일 인권위의 2025년 제3차 전원위원회에서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 제공: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