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판결로 소유권 논쟁은 끝나…‘약탈 문화재 반환’ 외교 협상 시급
지난 1월 24일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일반에 공개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오는 5월 5일까지 딱 100일간만 공개된다./김찬호 기자
[주간경향] 지난 1월 24일,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불상 한 점이 공개됐다. 높이 50.55㎝, 무게 38.6㎏의 이 불상은 금속을 녹여 관음보살을 형상화했다. 불교에서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자연히 관음보살상에는 해당 지역 사람들의 시대적 바람이 담기게 된다. 이는 불상이 종교적·예술적 가치를 넘어 그 자체로 역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날 공개된 불상도 제작 시기, 처음 모신 장소 등이 특정된 귀중한 사료다. 고려 말인 1330년 2월 서주 지역에서 제작됐고, 총 32명의 시주자가 있었으며, 불상을 모신 절의 이름이 부석사라는 것까지 확인됐다. 현재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고려시대 행정 명칭이 서주다. 이 지역에 있는 부석사는 677년에 창건된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에 있는 ‘서산 부석사’가 유일하다. 즉 현재의 서산 부석사가 불상이 원래 봉안된 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서 공개된 것은 647년 만에 처음이다. 이마저도 오는 5월 5일 ‘부처님 오신 날’까지 딱 100일간만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후 불상은 부석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섬(대마도)에 있는 관음사로 옮겨진다.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고향에서 보내는 마지막 100일이다.
지난 1월 24일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일반에 공개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오는 5월 5일까지 딱 100일간만 공개된다./김찬호 기자
불상의 기구한 운명
서산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자락에 안겨 있는 듯해 고즈넉한 멋을 만끽할 수 있다. 다만 세계문화유산인 영주 ‘부석사’처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유명 관광지는 아니다. 오히려 템플스테이같이 조용히 ‘쉼’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1일 찾은 서산 부석사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모두 무색하게 만들었다.
절 초입부터 도비산 자락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설 연휴 동안 내린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아 산 아래 차를 두고 걷는 사람들이었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며 그렇지 않아도 좁은 주차장은 빈 곳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길 군데군데 걸린 현수막은 이들이 추운 겨울 산길을 오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현수막에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귀향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에 공개되는 일정이다.
지난 2월 1일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충남 서산 부석사를 방문했다./김찬호 기자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는 정식 이름보다 유명한 출처 불명의 별칭들이 있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 훔쳐 온 불상 등이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1330년 2월에 제작돼 봉안된 불상은 14세기 말,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85년,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해당 불상이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있다고 알린다. ‘서산 부석사 불상이 왜 일본에 있느냐’를 두고는 여러 설이 제기됐다. 이중 가장 유력한 것이 왜구 약탈설이었다.
고려말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는데 현재의 서산 지역도 대표적인 피해지였다. 지금은 간척 등으로 주변 지형이 변했지만 서산 부석사는 약 700년 전에는 배를 타고 지나가며 볼 수 있을 정도로 해안에서 가까운 절이었다. 실제로 ‘부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물에 떠 있는 바위를 뜻할 뿐만 아니라 창건 설화에도 ‘해적’이 나온다. 각종 사료를 기반으로 절이 왜구에 침략당했을 때를 특정해보면 1375년 9월, 1378년 9월, 1381년 9월로 좁힐 수 있다. 이중 침략 경로 등을 종합해볼 때 서산 부석사가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가장 유력한 해는 1378년 9월이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이라는 별칭은 이렇게 붙었다.
또 하나의 별칭이 추가된 것은 2012년 10월 6일경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이날 대마도 관음사에서 불상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라진 불상 두 개가 한국으로 밀반입됐는데 이중 하나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었다. 절도범들이 붙잡히는 과정에서 불상이 압수됐고, 정부가 일본에 불상을 반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서산 부석사가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소송(2013년 2월 19일)과 유체동산인도소송(2016년 4월 20일) 등을 제기했다. 2023년 10월 26일, 대법원 판결까지 장장 10년이 걸린 불상을 둘러싼 법정 다툼의 시작이었다.
지난 1월 24일 서산 부석사 주지 원우 스님이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찬호 기자
불상 소유권을 두고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불상이 제작·봉안된 고려시대 사찰 ‘서주 부석사’와 원고(서산 부석사)는 동일한 권리주체로 볼 수 있지만, 일본 관음사가 불상을 시효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원고는 이 사건 불상의 소유권을 상실하였다”고 판결했다. 원래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 있던 것이 맞지만, 일본 관음사가 법인격을 취득한 1953년 1월 26일부터 20년간 소유의 의사로 점유(자주점유)해 취득시효가 완성됐다는 것이다. 이로써 ‘64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00일’이라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기구한 운명이 확정됐다.
소유권 논란만 끝, 약탈 문화재 반환은 시작
대법원은 일본 관음사의 불상 소유권을 인정했지만 이를 언제까지 반환하라고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한 문화재 관계자는 “1951년 발견된 불상의 복장물(불상 몸 안에 넣는 모든 물건)에서 ‘고려국서주부석사’라고 적힌 결연문까지 나왔는데 1953년 법인격을 취득한 관음사가 평온·공연하게 자주점유를 했다는 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며 “결국 대법원이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니 어정쩡한 판결로 정부에 결정권을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불상 소유권을 다툰 법원의 시간이 끝났을 뿐, ‘약탈 문화재 반환’이라는 외교의 시간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부석사 주지 원우 스님은 “불상은 원래 그 시대, 지역의 고통을 해결하고 싶다는 종교적 염원을 담아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일본 관음사에 불상을 모셔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유권과 별개로 불상 반환 운동은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외에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1982년 멕시코 출신 변호사 호세 루이스 카스타냐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서 고대 마야인들의 문서 ‘코덱스’를 훔쳐서 멕시코로 밀반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체포된 후 해당 문서를 멕시코 국립 인류 역사학 연구소에 기증한다. 프랑스는 ‘명백한 절도행위’라며 반환을 요구했지만 멕시코 정부 역시 완강히 거절한다. 결국 멕시코와 프랑스가 협상에 들어갔고, 멕시코 국민의 여론이 악화하자 프랑스는 자신들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대신 ‘3년 갱신으로 문서를 멕시코에 대여’하기로 했다. 이후 2009년에는 ‘영구대여’ 형식으로 개정했다.
지난 1월 24일 서산 부석사에서 일반에 공개된 ‘금동관음보살좌상’. 오는 5월 5일까지 딱 100일간만 공개된다./김찬호 기자
코덱스 반환 사례는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약탈 문화재 반환에 필수임을 보여준다. 이중 관심은 이미 확인된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모신 서산 부석사 ‘설법전’ 앞에는 불상을 보기 위해 일시적으로 긴 줄이 생길 때도 있다. 관람 안내를 맡은 부석사 관계자는 “매일 평균 500명 이상이 불상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오고 있다”며 “각 사찰에서도 불상을 보고 싶다는 문의가 오는데 한꺼번에 수용할 수가 없어서 순번을 정해주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원우 스님은 “직접 불상을 본다면 금속을 녹여서 모양을 만드는 주조 방식으로도 이토록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에 문화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여러 문화재위원으로부터 우리나라로 환수할 수만 있다면 국보급 수작이라는 이야길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언론에서 ‘훔쳐 온 쓰시마 불상’ 등의 표현을 쓰는데(조선일보, 1월 24일자 기사) 대법원 판결로 이미 일본에 돌려줬고, 현재는 정당한 대여계약을 맺고 부석사에 모시고 있다. 더 이상 이런 표현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남은 것은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다. 그러나 한·일관계 개선을 성과로 강조해온 정부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실제 성과도 확인되지 않는다. 불상이 한국에 있을 때 ‘약탈 문화재 반환 협상’을 시작하는 것과 일본으로 돌아간 뒤 협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제 100일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