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①1951년 1월 리지웨이: 망한 조직을 살리는 법
①1951년 1월 리지웨이: 망한 조직을 살리는 법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월튼 워커 장군에 이어 6.25전쟁 두 번째 미8군사령관으로 재직한 매슈 리지웨이 장군. 미 육군(위키미디어 커먼즈)
“월튼 워커 중장 사망.”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의 도쿄 사령부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의정부 남방 4㎞ 지점에서 워커 미8군사령관의 지프가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 워커가 현장에서 숨졌다는 소식이다. 워커는 이날 미24사단에서 표창을 한 뒤, 해당 사단 중대장으로 복무 중인 외아들 샘 워커 대위(1977년 대장 진급)를 만날 예정이었다.
사고는 워커 부자에게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유엔군 전체로 봐도 최악의 비보였다. 두 달 전 압록강을 찍고 전쟁을 곧 끝내겠다고 큰소리치던 유엔군은 30만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38선 근처까지 퇴각했다. 되찾은 서울을 또 내주려던 찰나, 그 어려운 때 전선 총사령관이 죽었다.
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2주 전 로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적진을 넘나들며 위험한 곳을 마구 돌아다니는 워커에게 혹시나 일이 생기면, 누굴 후임으로 앉힐지 논의했었다. 맥아더는 바로 콜린스에게 미리 찍은 ‘그 사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은 1950년 12월 23일,
워커 후임으로 8군을 이끌 ‘그 사람’은 바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
. 당시 미 육군 작전·행정참모부장이다.북한을 돕기 위해 출병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고 있다. 정확한 날짜는 미상. 이 사진은 1958년 북한에서 발간된 기념 책자에 실린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후퇴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일"
역사학자 시어도어 페렌바크
① 등장: 대한민국이 가장 위태로웠을 때
전쟁 발발 반년. 전황은 최악이었다. 국군과 미군은 1950년 8월 낙동강에서 버티고, 9월 인천으로 상륙해 전세를 뒤집은 뒤, 10월 초 38선을 돌파해 쾌속 북상했다. 그러나 10월과 11월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두 차례 공세를 얻어맞았다. 12월 평양, 개성을 차례로 내줬다. 이때 참전한 역사학자 시어도어 페렌바크의 말처럼 “한 번 시작된 후퇴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흔히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까지 밀린 1950년 8월을 6.25 최대 위기로 아는 이들이 많다. 남은 영토 면적(한반도 10%) 측면에선 그럴 수 있지만,
수뇌부의 의지나 군대 사기 측면에서 최악의 시점은 1950년 12월 말(38선 이북 포기)부터 1951년 1월 초
(서울 재철수)다.1950년 9~12월 전황
우선
미국 정부와 미군 지휘부가 전쟁 의지를 접은 상태
였다. 1951년 1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에게 보낸 서신은 절망적이다. “치명적 손실을 피하기 위해 대피가 명백히 필요한 상황이면, 귀관 판단에 따라 한국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라.” 맥아더가 당시 예하 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도 철수(evacuation)란 말이 자주 언급된다. 미국 국내 사정도 나빴다.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 개입을 법안으로 지원하던 민주당이 195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의회도 한국에 군대를 유지시키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했다.미국만 그랬던 건 아니다. 당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도 회고록에서 1950년 12월 31일을 떠올리며 “극도의 허탈감으로 후퇴할 기력조차 잃었다”고 썼다. 영국 터키 등 다른 유엔군 파병국도 미국 리더십에 의구심을 가진 상태였다.
한반도 남쪽에서 싸우는 누구도 강력한 항전을 주장하지 못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시기’다
.복싱에 비유해 보자. 낙동강 전투는 1라운드 초반 코너에 몰려 난타 당하는 상황과 같다. KO 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잔뜩 움츠리며 소나기 펀치를 버틸 투지와 힘은 남아있다. 결국 기회를 엿보다가 회심의 레프트 훅(인천 상륙)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낙동강 돌파)를 적중시키며 위기를 탈출했다. 그러나 1.4후퇴는 체력과 정신력을 상실한 채 링 가운데서 비틀거리던 그로기 상태였다. 코치(미 정부)가 흰 수건을 던지기 직전이었다.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자유낙하 하던 순간, 리지웨이가 한국에 급파됐다. 버티느냐, 끝나느냐.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운명이 리지웨이 양 어깨에 걸려 있었다.
리지웨이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매슈 리지웨이 이력. 그래픽=김대훈 기자
"나의 한국전쟁 개입은 한 발의 총성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워커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린 리지웨이의 소감
②준비: 우리 편 마음부터 잡자
1895년생 리지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명장인 맥아더(1880년), 조지 패튼(188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년)의 다음 세대 장군이다. 당시 미 육군에선 장교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은 리지웨이만큼 잘 하는가, 리틀 리지웨이로 부를 인물인가’(데이비드 핼버스탬)라는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 세대 장교들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경력’(토머스 릭스)을 거쳤다.
미국이 전쟁 지역 지상군 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카드
였던 셈이다.1950년 12월 23일 오후(한국시간) 인사 통보를 들은 리지웨이는 당시로선 기록적인 속도로 한국에 날아왔다. 하루 만에 워싱턴을 출발, 12월 26일 0시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고, 당일 오전 9시 30분 맥아더와 면담했다. 2시간 반 후 다시 도쿄를 출발, 26일 오후 4시 8군사령부가 위치한 대구에 도착했다. 27일 새벽엔 서울로 날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리지웨이의 부임 과정은 속도, 내용 모두에서 완벽
했다. 강행군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워커 여사를 찾아 조의를 표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이동 중 미8군 장병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고, 한국 도착 직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연락해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함께 싸워야 한다”며 용기를 불어넣었다.서울 도착 당일 이 대통령과 대화에선 미국에 대한 불신(철수 가능성)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리지웨이는 이 대통령에게 ‘철수를 위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촉촉하게 눈이 젖은 고령의 전사 손을 잡고’ 신속히 부대를 정돈해 다시 공세로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이 가장 원했던 대답이었다.
워커 사망 이후 리지웨이의 숨가쁜 일정. 그래픽=송정근 기자
"우리 보병은 미군 역사의 영광스러운 선배들이 가졌던 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선배들이 무덤 속에서 몸서리를 치고 있을 것이다."
8군 순시 후 리지웨이가 육사 동기 콜린스 대장에게 보낸 서신
③시작: 가장 위급한 현장을 먼저 보라
패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리지웨이는 취임 즉시 최대한 많은 부대를 직접 방문했다. 통상 리지웨이 같이 이름난 리더가 침몰하는 조직의 구원투수로 투입되면, 자기 선입견이나 성공사례에 기반해 조직의 체질을 뜯어고치려고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편견을 완전히 빼고, 직접 본 것으로만 판단
하려고 했다. 이 점이 리지웨이의 매우 특출난 부분이다.1950년 12월 27일 오전 이승만을 만난 리지웨이는 오후부터 전방부대를 돌았다. 이날에만 미1군단, 영국29여단, 미25사단, 국군1사단, 미9군단을 순시했다. 경비행기, 헬기, 지프를 계속 갈아타며 순시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엔 후방 경주에 있던 미10군단까지 찾아갔다. 48시간 동안 8군 예하 모든 군단장과 사단장(동해안 국군 수도사단만 제외)을 만나, 최악의 상황을 현장 지휘관 입으로 직접 들었다.
일선부대를 순시한 리지웨이는, 그제서야 왜 세계 최강 미군이 장비도 보급도 열악한 중공군에게 밀리는지 알 수 있었다.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독일·일본을 동시에 때려잡던 미군의 전투력과 군인정신은 5년의 평화를 거치며 녹슬어 있었다
. 확신을 잃어버린 지휘관, 야전교범을 따르지 않는 장교와 부사관, 군기를 상실한 병사들만 있었다. 리지웨이는 이런 군대를 다시 ‘싸우는 군대’로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을 직감했다.리지웨이는 즉시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사령관 재량 안에서 △따뜻한 식사를 제때 공급하고 △겨울 날씨에 버틸 방한피복을 충분히 제공하며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에 필요한 문구류를 대량 보급하는 일이다. 추위, 배고픔, 그리움 같은 ‘원초적 욕망’을 풀어주는 게 급선무였다. 기본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군대에 정신력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걸 리지웨이는 잘 알았다.
매슈 리지웨이(왼쪽) 미 8군사령관이 1951년 1월 4일 서울 철수 당시 한강에 부설된 부교를 점검하고 있다. 미1군단 촬영(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는
전장을 최대한 가까이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 유엔군이 긴 후퇴를 멈추고 북진을 모색하던 1951년 1월 24일, 얼 패트리지 미5공군사령관(소장)이 조종하는 2인승 훈련기를 타고 전선에서 32㎞ 지점까지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지상 상황을 관찰했다.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던 당시도 장군 두 사람만 소형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하는 건 웬만한 배짱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정찰 다음날 유엔군은 1.4후퇴 이후 처음으로 역공을 시작했다.두 달 후인 3월 23일 미187공수연대전투단이 파주 문산에서 공수작전을 할 때도, 리지웨이는 상황을 보러 경비행기를 타고 최전방에 착륙했다. 병력이 가득한 맨땅에 내리기 위해 리지웨이가 탄 비행기가 다섯 번이나 앞뒤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리지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려 병사들을 만났을 때, 사살된 중공군이 아직 피를 흘리고 있을 정도로 전투 상황이 급박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공수사단장으로서 직접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리지웨이에게, 이 정도는 흔한 현장 지휘였다.
매슈 리지웨이는 3성, 4성 장군이 되어서도 항상 왼쪽 가슴에 구급낭, 오른쪽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녔다. 가슴에 달린 수류탄은 그의 트레이트 마크와 같았다. 미 육군
"리지웨이 사령관은 사령부를 비우고 최전선 부대를 따라다니며 천막에서 살았다. 위급할 때 지휘관은 최대한 전선 가까이 붙어야 한다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
④전환: 왜 이겨야 하는지를 납득시켜라
전투 여건을 보장한 리지웨이는 정신력 강화에 손을 댔다. 살면서 ‘코리아’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미군 병사들은 왜 자신들이 이 더럽고 냄새 나는(인분을 비료로 쓰던 때라 당시 미군 회고록에는 한국의 첫인상을 냄새라고 표현한 기록이 많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그걸 납득시켜야만 이길 수 있다고 봤다.
리지웨이는 1월 21일
전 장병에게 하달한 지휘서신에서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알렸다
. 미군 투입 이유에 대해 “합법 절차를 거쳐 구성된 정부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고, 이 이상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며 군의 문민통제를 강조했다. 싸우는 이유에 대해선 “서구 문명이 공산주의를 물리치느냐, 공산주의자들이 개인 권리를 신성히 여기는 사람들(자유주의자)을 지배하게 될 것이냐가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한국만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진영 전체의 생존이 걸린 전쟁이란 점을 부하들에게 일깨운 것이다.리지웨이는
언제나 수류탄과 구급낭을 가슴에 달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며, 부하들과 함께 걷기
를 마다하지 않았다. 부대 시찰 때 절대 사열대에 오르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병사들을 봤다. 리지웨이는 그렇게 병사들 가까이에 있으면 “그들이 나에게 뭔가(솔직한 이야기)를 말하게 된다”고 귀띔했다.이를 두고 핼버스탬은 “리지웨이 리더십은 평등주의 시대에 좀 더 적합했다”고 평가했다. 일장 훈시를 통해 정신력만 강조하는 구식 리더십이 아니라, 여건을 보장한 뒤 동기를 부여하고 같이 현장에서 뛰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동기 부여’와 ‘구성원에 대한 개별 배려’를 중시하는 현대 리더십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더글러스 맥아더(앞좌석)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맥아더 뒤) 미8군사령관, 맥아더 사령부의 참모인 도일 히키 소장(운전석 뒤)이 1951년 4월 3일 강원 양양 지역을 순시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위키미디어 커먼즈)
"리지웨이의 긍정주의는 전염성이 있었다."
전쟁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
⑤증폭: 작은 승리부터 차근차근
싸울 기반을 제공하고 동기부여를 마친 리지웨이는 공격정신 주입에 집중했다. 각 부대 지휘소를 돌며 브리핑을 들을 때, 리지웨이는 방어를 묻기보다 ‘공격계획’이 무엇인지를 캐물었다.
한국 부임 중 도쿄에서 맥아더를 잠시 만난 1950년 12월 26일, 리지웨이는 “제가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맥아더는 “8군은 자네 것일세,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게”라고 답했다. 평생을 주인공이라고 믿고 산 맥아더가 부하에게 전권을 내어준 매우 이례적 장면이다.
1.4후퇴 때도 리지웨이는 오래 뒷걸음질칠 생각이 없었다. 평택-안성 라인에서 전열을 추스른 후, 서울 철수 불과 11일 만에 오산-수원 방면으로 중공군을 찾아 나섰다. 울프하운드 작전(1월 15~25일)으로 불리는 이 위력정찰전을 통해 수원 이남에 거의 병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바로 1.4후퇴 후 첫 반격인 선더볼트 작전(1월 25일~2월 11일)에 착수한다.
그 뒤로부터
4월까지 리지웨이는 공격 작전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전선을 위로 올리고 공산군 부대 간 연계를 차단
했다. 미10군단을 투입한 라운드업 작전(2월 5~11일)으로 서울 탈환 여건을 조성한 다음, 킬러 작전(2월20일~3월 6일)과 리퍼 작전(3월 7~23일)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3월 15일 결국 서울을 재탈환했다.이후 커레이저스 작전(3월 23~27일)으로 38선에 도달했고, 러기드 작전(4월 1~9일)으로 38선 이북 진격에 성공했다.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작은 성공’을 연달아 이어가자, 나락으로 떨어졌던 유엔군 사기도 쭉쭉 올라갔다.
리지웨이는 울프하운드부터 돈틀리스까지 여덟 개 작전을 이어가면서, ‘땅’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삼진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 부대를 찾아 압도적 화력으로 섬멸하는 것에 집중했다. 영토 확보보단, 적 자원을 소진시키고 적병 사상자를 늘리려고 했다. 1951년 3월 서울 탈환전에서도, 도심으로 밀고들어가기보단 서울 동쪽에서 한강을 건넌 뒤 서울 우측을 포위하며 적의 퇴각을 유도했다. 서울 재수복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리지웨이가 모르지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수도 공략도 나중으로 미룰 수 있을 정도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다. 군사적 실리보다 정치적 효과(인천상륙작전)를 먼저 생각한 맥아더와의 차별점이다.
리지웨이가 3개월 동안 펼친 작전. 그래픽=이지원 기자
"리지웨이의 성공은 신적인 장군 맥아더를 허풍쟁이로 만들었다."'제너럴스'의 저자 토머스 릭스
⑥결과: 전쟁 판도를 바꾼 100일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26일 한국에 부임, 이듬해 4월 11일 유엔군사령관(맥아더 후임)으로 승진할 때까지 약 100일 간 8군사령관으로 일했다. 1951년 1월 초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해 4월 38선을 넘어섰다. 도망칠 생각만 하던 군대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됐다.
군을 싹 뜯어고치고 사기를 높인 뒤, 전선을 100㎞ 이상 끌어올리는 가시적 성과까지 냈다. 첫 3주 간 중공군 예봉을 피해 후퇴작전을 해야 했던 걸 감안하면, 1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단 80일 만에 이룬 성과다. 미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은 “1951년 여름과 가을 한국에서 복무하던 수백 명과 의견을 나눈 결과, 거의 예외 없이 리지웨이가 전쟁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기억했다.
그의 업적은 전선을 위로 올렸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리지웨이가 전쟁을 ‘해 볼 만한 싸움’으로 만들자, 제주도로 한국 정부를 대피시키려던 미국 정부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거시적으로 전쟁 판 자체를 바꿨다
. 그가 오기 전 중공군에게 속수무책 밀리던 맥아더는 △대만군 참전 △중국 본토 침공 △만주 핵폭격 등 극단적 수단을 검토했다. 한반도에 파병된 미군 재래식 전력만으로 중공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 과격한 방안은 3차대전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1950년 10월 15일 한국전쟁 관련 회의를 위해 남태평양 웨이크섬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악수하고 있다. 맥아더가 계속 본국으로 오라는 지시를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대통령이 여러 차례 비행기를 갈아타고 남태평양까지 와야 했다. 미 국무부(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러나
리지웨이의 서울 재수복 이후 이런 주장은 쏙 들어갔고, 미국 정부는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한국전쟁을 ‘관리’할 수 있었다
. 리지웨이가 혼자 힘으로 전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면서, 트루먼 대통령도 일개 장군(맥아더)에게 끌려다니던 비정상적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리지웨이의 개인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번질 뻔 했던 전쟁을 유엔군 통제 범위 안으로 끌고 온 셈이다.그래서 한국전쟁 중 가장 전공이 컸던 유엔군 장군을 한 명 골라야 한다면, 주저없이 리지웨이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 미국 전쟁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미국 현대 군사 역사에서 리지웨이처럼 단시간에 지고 있는 전쟁을 회복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이 시리즈가 첫 번째 인물로 리지웨이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리지웨이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이 철저히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처럼 장쾌한 승전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고, 베트남전처럼 처절하게 실패한 전쟁도 아니다. 미국인들에겐 그저 ‘이국만리에서 벌어진 당혹스럽고 어정쩡한 충돌’(핼버스탬)에 불과했다.
미국의 역량을 모두 쏟은 총력전도 아니었다. △중국 본토로 반격 금지 △소련을 자극할 군사행동 금지 △핵무기 사용 금지 등 여러 조건이 더덕더덕 붙은 상황에서 싸우는 제한전이었을 뿐이다. 만일 한국전쟁이 유엔군의 승리와 공산군의 항복으로 마무리된 ‘영광의 전쟁’이었다면, 아마도 지금 리지웨이는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 못지않은 무명(武名)을 누리고 있을 지 모른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일반 전황>
-T. R. 페렌바크 ‘이런 전쟁’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⑧’
-남도현 ‘잊혀진 전쟁’
<주요인물 행적>
-매튜 리지웨이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토머스 릭스 ‘제너럴스’
-백선엽 ‘군과 나’
-윌리엄 R. 맨체스터 ‘아메리칸 시저 2’
-Roy Appleman ‘Ridgway Duels for Korea’
-Victor Davis Hanson ‘The Savior Generals’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Lawton Collins ‘Lighting Joe’
-Billy Mossman ‘Ebb and Flow’
-James T. Outland ‘General Matthew B. Ridgway and Army Design Methodology during the Korean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