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농사를 짓는 청년농부 이재영, 이윤선, 박건오씨(왼쪽부터)가 지난달 7일 충남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 ‘오와린’ 농장에서 농기구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농촌에도 청년들이 산다. 농사지어 제값 받기 힘들고, 기후위기로 농작물 피해가 늘어도 농부로 살겠다는 이들이다. 농사 아닌 다른 일을 하며 농촌에 머무는 청년도 있다. 각기 사는 모습도, 생각도 다르지만, 이들로부터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은 농촌에 사는 20~40대들을 만났다. 연령대는 넓지만 농촌에서는 모두 청년으로 통한다. 농촌 청년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고 있을까.
‘힘돈사’ 농부로 사는 법
충남 홍성 홍동면에 있는 ‘채소생활’은 청년들이 모여 만든 농장이다. 교사 출신인 농부 박건오씨(46)는 초보 농부들이 농사와 창업 등 다양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농장을 운영해왔다. 2017년 교육생으로 온 이윤선씨(34)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다양한 채소로 요리하는 것을 즐겼다. 두 농부는 계절채소의 아름답고 건강한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계절채소 농장을 시작하기로 했다. ‘채소가 가진 매력과 신비, 재미와 의미, 맛과 멋에 대한 탐구’를 농장의 표어로 내걸었다. 이렇게 생긴 채소생활은 17년차 농부인 박씨에겐 동료가 된 교육생과 만든 다섯번째 프로젝트 농장이기도 했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 채소생활 농장. 청년농부들이 ‘다품종 적정생산’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다. 서성일 선임기자
큰 면적의 논과 대형 농기구가 있어야 수익이 나는 벼농사나, 시설비가 많이 드는 축사, 묘목을 심고 3~4년 뒤에야 열매를 볼 수 있는 과수와 달리, 채소 농사는 기반 없는 농부들에게 진입장벽이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한다. 작기도 짧아서 경험을 빨리 쌓을 수 있고, 한 작물에서 손해를 보면 다른 작물에서 벌충할 수도 있다. 둘은 마을의 빈 하우스를 빌려 농사를 지었다.
지난달 7일 홍동면 팔괘리에 있는 채소생활 비닐하우스. 난방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농장에는 부직포 등으로 덮은 작은 터널이 있었는데, 터널 안에는 케일, 경수채(치커리와 비슷하게 생긴 쌈채소) 등 잎채소들이 심어져 있었다. 채소생활 농부들은 수년간 일구지 않은 이웃의 밭을 빌려 노지(露地·비닐하우스 없는 맨땅) 농사도 짓는다. 이날 채소생활의 노지 밭에는 양배추, 배추, 무, 순무, 당근 등 추위에 강한 월동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다품종 계절채소를 꾸러미로 묶어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판매하거나 회원들에게 보낸다. 정기적으로 채소박스를 받아보는 구독회원은 85명이다. 레스토랑 등 고정적으로 거래하는 업체도 10곳쯤 된다고 했다.
채소생활(@vegelab)은 지난달 6일 월동채소로 구성된 ‘채소박스 소한편’을 인스타그램에 소개했다. 이윤선씨가 디자인한 채소 사진 그래픽이 첨부돼 있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취재 전날은 절기로 강추위가 시작된다는 ‘소한’이었는데, 채소생활 농부들은 양배추·순무·보라케일·허니케일·베이비당근 등 월동채소들을 수확해 ‘채소박스 소한편’이란 상품으로 준비했다. 박스에는 ‘달군 팬에 마늘을 볶은 뒤 순무를 넣고 마지막에는 순무잎까지 넣어 볶아주세요’ 등 요리법까지 넣었다. 가격은 3만5000원.
SNS 홍보용으로 쓰이는 아기자기한 채소 사진 그래픽은 이 농장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전공한 이씨의 작품이다.
“농장에서 잎이 달린 당근을 처음 본 날, 정말 예뻐서 빠져든 거죠. 채소는 완벽한 오브제(대상)예요. 이 아름다움을 알려나가는 일이 제 원동력이죠.”
하우스 한 동은 모판에 씨를 뿌려 모종을 키우고 있었다. ‘펜넬, 딜, 고수, 잎들깨, 시금치, 골든보이베이비…’ 50여개 품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품종으로는 100종이 넘는다. 여러 종류의 채소를 소량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직접 씨앗을 구해 모를 키운단다. 한쪽에는 종자 보관 냉장고도 있었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오와린’ 농장에서 청년농부 이재영씨가 지난달 7일 비닐하우스내 채소를 살펴보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이들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다. 하우스와 밭에 넣는 거름도 최소화한다. 멀칭(mulching·농작물이 자라는 땅을 짚이나 비닐 따위로 덮는 일)할 때도 여러 번 재사용할 수 있는 부직포를 쓴다. 농가에서는 통상 농사 시작 전에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어 땅을 부드럽게 만드는 ‘로터리(경운) 작업’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땅속의 탄소가 배출된다. 채소생활 농부들은 밭을 갈아엎지 않는다. 이런 농법은 ‘자연농법’ ‘재생농법’ ‘파머컬처’(지속가능농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재생유기농법’이라고 소개했다.
채소생활은 재생유기농법을 하려는 농부를 키우는 ‘인큐베이팅 농장’이기도 하다. 그동안 채소생활에서 함께 일한 농부만 12명에 이른다. 홍동면에서 ‘오와린’이라는 이름의 농장을 운영하는 이재영씨(23)도 한동안 이곳에서 재생유기농법을 배운 뒤 독립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는 재생유기농법을 위한 소형 농기구 등이 많이 있는데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들다. 이씨는 직접 소형 농기구를 제작해 농사에 쓴다. 채소생활 농부들도 이씨의 농기구를 사용한다. 이씨는 “(채소생활 농부들과는) 경운과 비닐 멀칭을 하지 않는다는 걸 넘어 흙을 회복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채소농사를 짓고 있는 청년농부 박건오, 이재영, 이윤선씨(왼쪽부터)가 충남 홍성군 홍동면 풀무학교 생협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지난달 7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채소생활 농부들은 농장을 시작할 때 자신들이 ‘초보 농업인이자 초보 사업가’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뒀다고 한다. 박씨가 말했다. “초보가 수억에서 수십억의 빚을 지고 농업을 시작하는 게 건강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적정 규모에서 농사지으면서 1인당 최소 월 300만원 정도를 가져갈 수 있도록 수익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농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지속 가능해야 하니까요.”
이곳에 모인 청년 농부들은 자연스레 농업의 미래를 고민한다. ‘힘돈사’는 구성원들이 농업 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할 때 곧잘 쓰는 말이다. ‘힘은 들고, 돈은 안 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직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박씨가 말했다. “17년차 농부인 제게도 ‘힘돈사’는 여전히 고민되는 부분이에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농촌에 새로운 세대를 들이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스마트팜’이 대안이 될까
청년농업인 고택균씨가 농사를 짓고 있는 전북 김제시 백구면 김제스마트팜혁신밸리내 임대형농장에 지난달 6일 딸기가 열려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홍성의 청년농들이 적정 규모로,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흙을 일구는 농업을 하는 반면, 전북 김제의 고택균씨(35)는 대규모 첨단 시설에서, 자동화된 장비를 쓰며, 배양액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른바 ‘스마트팜’이다. 고씨는 정부와 지자체가 만든 임대형 스마트팜 단지에서 딸기를 재배한다. 이곳은 청년농을 대상으로 20개월간 농업 및 경영 교육을 하고, 교육을 마친 이들에게는 임대형 스마트팜 입주권을 주고 3년간 농사를 짓게 해준다. 임차료는 연 35만원. 고씨는 올해로 3년째가 됐다.
지난달 6일 김제 백구면의 ‘스마트팜 혁신밸리’. 빨갛게 익은 딸기를 수확하는 고씨 머리 위로, 윙 하는 기계 작동 소리가 들렸다. 광량이 적고 날이 추워지자 비닐하우스가 스스로 창문을 닫는 소리였다. 별도의 코딩이나 명령 없이도 알고리즘이 그간의 농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환경을 유지해준단다.
문제는 혁신밸리를 나간 뒤 일이다. 고씨는 올해 6월 혁신밸리 사용기간이 만료되면 고향인 제주에 내려가 딸기 농사를 지으려 한다. 비용이 문제다. 지금 누리는 최첨단 설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600평 비닐하우스를 빌려, 직접 프로그래밍해 낮은 단계의 스마트팜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코드를 일일이 짜넣어서 특정 조건이 되면 창문을 여닫거나 온도를 조절하는 수준의 농장을 계획 중이란다. 그는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했다. 초기 투자 비용은 4000만원 정도로 예상한다.
청년농업인 고택균씨가 지난달 6일 전북 김제시 백구면 김제스마트팜혁신밸리 임대형농장에서 딸기 수확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통상적으로 하우스는 냉방 없이 난방만 하는데, 고씨는 ‘하우스에 냉방시설을 추가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제주의 농장들이 지난해 여름과 가을에 폭염 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고씨는 “냉방은 난방보다 시설비가 4배는 많이 든다”고 했다. 초기 투자 비용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씨는 낮은 단계의 스마트팜을 1200평까지 늘리고 단계별로 수준을 고도화하겠다고 했다. 고씨는 “1200평에 첨단 시설로 지으려면 땅값을 빼고도 5억은 넘게 들 것”이라고 말했다.
고씨처럼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독립 경영 3년 이하 농부들은 정부의 ‘청년농업인 영농정착 지원 사업’ 대상이다. 교육이수 시수와 5년치 영농계획서 등을 토대로 심사해 선발된 청년농에게 가구당 최대 5억원의 정책자금을 저리로 빌려준다. 이에 청년농에 지원하는 청년이 매년 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2027년까지 청년농 3만명 육성’을 내걸며 청년농 선발 규모를 대폭 확대했지만, 정책자금 예산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예산에 비해 선발된 청년농이 너무 많아지자, 한번 더 심사해 대출 지원 대상을 선별하기로 했다. 당연히 대출 지원 대상이라 생각하고 각종 계약을 진행했던 청년농들은 대출금이 나오지 않아 계약이 파기되는 등 손해를 입었다. 정부는 올 초가 돼서야 관련 예산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피해를 본 청년농들이 상당수다.
청년농업인 고택균씨가 지난달 6일 전북 김제시 백구면 김제스마트팜혁신밸리 임대형농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고씨는 “들어보면 선발된 청년농 10명 중 2~3명만 통과하는 격이더라”며 “나도 기존에 세웠던 계획을 줄이고 더 작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했다. 대출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한 해 농사 계획이 모두 틀어진다. 고씨는 “딱 그때 투자를 못하면 농사 들어가야 할 시기 자체를 놓쳐버리니 1년을 날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년농업인 정책자금은 5년 거치 20년 상환이다. 만약 5억원을 빌리면, 5년 이후 원리금을 상환하기 시작할 때 매년 수천만원씩 갚아나가야 한다. 고씨는 “높은 투자 비용이 들어가고, 망하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며 “준비를 잘해서 농사로 꾸준히 수익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혁신밸리에서 그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위치 등의 문제로 공동체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단다. 고씨는 “혁신밸리의 청년농들은 시내에 있는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농사를 짓는다”며 “혁신밸리는 ‘농업’이 이뤄지는 곳이긴 하지만, ‘농촌’은 아니었다”고 했다.
마을에 남기를 택한 청년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란 청년농부 전태희씨가 서산군 음암면 부산리 자신의 집앞 보리밭에서 지난달 15일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충남 서산 음암면 부산리 토박이 전태희씨(20)는 자신이 농부로 살아갈 것을 의심한 적이 없단다. 도시는 화려하고 편리하지만 그에겐 “문화생활을 즐기러 하룻밤쯤 놀러 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단다.
“다들 ‘왜 농촌에 남기로 했냐’고 묻지만, 저는 오히려 아파트와 상가만 있는 동네에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전 원래 여기 사람인걸요.”
전씨의 부모는 논 1만2000평과 밭 1만평에서 유기농 벼와 무, 배추, 메주콩,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 전씨도 농사를 함께한다. 전씨는 “파머컬처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체험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치유농업사 교육도 받았다.
어머니 신채봉씨(51)가 말했다. “농사지으려면 기계로 크게 짓고, 화학비료와 농약을 써야 하는데 실험을 해보고 싶은가봐요. 농작물을 재배하며 치유받는 ‘치유농법’ 실험도 해보고 싶어 하고요. 언젠가는 자립할 수 있도록 해보라고 지원해줄 생각이에요.”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란 청년농부 전태희씨(왼쪽 세번째)가 서산군 음암면 부산리 2구 부녀회 모임에 지난달 16일 참석해 환히 웃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지난해부터 생긴 다른 변화도 있다. 전씨는 어머니를 따라 가끔 얼굴을 비치던 마을 부녀회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씨는 어릴 땐 부녀회원들을 ‘할머니’라고 칭하다가 이제는 ‘언니’라고 부른다.
지난달 15일 부산리 김미령씨(64)의 집에서는 부녀회 월례회의가 한창이었다. 40~60대로 구성된 부녀회원 20명 중 7명이 참석했다. 부녀회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마을 대소사를 논의했다. 전씨의 안건이 마지막으로 올라왔다. “언니들, 우리 부녀회 언제까지 ‘부산리2구 부녀회’라고 할 거예요?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봐요.” 다들 호응했다. 전씨는 미리 준비한 이름과 디자인한 로고를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올렸다. ‘1번 우주최강부녀즈, 2번 밭에서온그녀들, 3번 들꽃연대, 4번 동네꽃크루, 5번 장독대히어로즈.’
우주최강은 “너무 거창하다”며, 히어로즈는 “이게 뭔 뜻이냐”며 탈락됐다.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건 ‘밭에서온그녀들’이었다. 회의에 오지 못한 회원들의 투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부녀회에 처음으로 이름이 생긴 순간이었다.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산리2구 부녀회원들이 새로 지은 부녀회 이름인 ‘밭에서 온 그녀들’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플래카드에 그려진 로고는청년농부 전태희씨(오른쪽 아래)가 디자인한 것이다. 서성일 선임기자
농촌에서 자랐더라도 전씨처럼 남기를 택하는 청년은 귀하다. 정금덕 부녀회장(59)은 “젊은층이 있어야 생각하는 폭이 넓어진다”며 “우린 이만큼밖에 못 보더라도, 청년들은 ‘이런 걸 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가능성을 찾아내기도 하니 세대가 다양할수록 마을이 살아난다”고 했다.
이는 부녀회원들이 몸으로 겪은 일이기도 하다. 부녀회는 얼마 전까지 70대 이상 여성 노인들이 주도하는 형태였다. 마을은 2년여 전 노인회와 부녀회를 분리하기로 했다. 40~60대만 부녀회에 남으면서 활동도 변화무쌍해졌다. 신씨가 말했다.
“농촌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거든요. 옛날분들은 ‘여자가 왜 나서냐’는 생각이 강하죠. 이전 부녀회는 의견을 내기보단 잔칫날 밥을 하기 바쁜 조직이었어요.”
지난 2년간 부녀회는 여성 농업인 대상 공모 사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전씨는 부녀회에서 지원용 서류 작업과 홍보용 영상·그래픽 제작을 도맡았다.
정 회장은 “예전엔 상상도 못하던 일”이라며 “의구심을 갖고 보던 노인회에서도 이젠 ‘젊은이들이 노력해주니 고맙다’며 좋아하시더라”고 전했다. 세대별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밭에서 온 그녀들’은 청년이 마을에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했다.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란 청년농부 전태희씨가 서산군 음암면 부산리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지난달 15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전씨도 같은 청년으로서 또래를 바라고 있다. 꼭 농사짓는 청년이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사실 저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지 않으셨다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만큼 농업은 청년들의 진입이 쉽지 않은 분야예요. 마을에 맞는 사람이 오길 바라기보단 저마다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농촌 문화에 어떻게 융합시킬 수 있을지를 마을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씨는 ‘농촌’ 개념을 넓히고 싶다고 했다. 거주하지 않더라도 마을 공동체의 철학에 공감하는 청년들을 온라인에서 모으고 싶다고 한다. 그는 “건강하게 먹으며 살고 싶다거나, 자급자족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연결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마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톡방’에 모인 진안 청년 150명
이현정씨(41)는 세 아이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2019년 경남 창원에서 전북 진안으로 이사했다. 이사온 지 첫 6개월쯤 지나자, 그는 “여긴 정말 청년이 없구나” 하고 낙심했다고 한다. 어딜 둘러봐도 청년을 찾아볼 수 없어서다. 그러다 직장 동료로부터 진안군청년협의체가 기획한 모임, ‘밥수다’를 알게 됐다. 청년들이 모여 식사를 함께한다는 말에 그는 주저 없이 참여했다.
진안군청년협의체 회원들이 함께 밥을 먹는 모임 ‘밥수다’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진안군청년협의체 제공
“밥수다에 가니 청년이 30명 넘게 있더라고요. 오랜만에 설렜죠.” 이후로도 협의체를 하루이틀 거듭 찾던 그는 현재 협의체 부대표를 맡고 있다. “그때 협의체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방황하다가 다시 도시로 나갔을 거예요.” 이씨의 말이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은 ‘물리적으로’ 청년을 지역에 유치하기 위한 정책을 편다. 청년에게 이사비, 보증금, 출산지원금 등을 주는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청년을 반짝 끌어왔더라도 이들에게 터 잡고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진안은 뭐가 달랐을까. 협의체는 진안군이 청년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2018년 군 차원에서 조직했다. 여느 행정 주도의 모임처럼 이는 흐지부지될 뻔하다가, 청년들이 직접 협의체 운영 방식을 결정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활성화됐다. 소규모 동아리를 지원하기도, 청년 포럼 등 행사를 주최하기도 한다. 만 18세에서 45세까지 활동할 수 있다. 현재 가입 인원은 150명 언저리에 이른다.
카카오톡 단체방에선 ‘아이가 아픈데, 어느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까요?’ ‘보일러 가게 전화번호가 있을까요?’ 같은 일상적인 질문부터 구인구직까지 광범위한 정보가 오간다.
전북 진안의 청년협의체 회원과 주민들이 2021년 7월23일 마이산이 보이는 진안 사회적경제 공유센터에서 열린 ‘고민비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이 행사는 맥주 한 잔 마시며 고민을 잠시 잊자는 취지로 협의체 회원들이 기획했다. 진안군청년협의체 제공
협의체에는 원래 진안에 살던 이들과 귀촌·귀향한 이들이 두루 섞여 있다. 박하영씨(32)는 진안 출신으로 서울살이를 하다가 귀향했다. 박씨는 개인이 알아서 잘 살아내야 하는 도시 정서가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 낯설기도 했는데, 협의체가 있어서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됐다”며 “공동체 안에서 여러 일을 하며 귀한 존재로 대우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함께한 진안 농부 배이슬씨(35)는 “2019~2020년에 다른 지역에서도 청년협의체가 만들어졌지만 그중 자발적으로 이렇게 오래 활동하는 단체는 거의 없는 거로 안다”며 “진안군처럼 작은 지역에서 많은 청년이 한꺼번에 모이는 것도 진귀한 일”이라고 했다.
농사짓는 청년뿐 아니라 직장인, 자영업자, 프리랜서,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함께 있다보니 구성원들이 모여 여러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협의체 구성원 중 10명은 서로 다른 능력치를 모아 2년 전 비영리단체 ‘달빛정류장 협동조합’을 발족했다. 디자인이나 영상 외주를 받아 2023년 하반기에만 50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전북 진안의 달빛정류장협동조합 조합원들이 지난해 진안읍의 한 북카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달빛정류장협동조합 제공
올해 상반기에는 진안에 청년들의 공간인 청년센터가 만들어진다. 청년센터는 협의체가 지자체에 독립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이후에도 청년 공동체를 성실히 일궈왔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성과다. 청년협의체 대표인 육성룡씨(40)는 “어떤 이유로 진안에 왔건, 사람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양성이 적을 수밖에 없는 농촌에서 다양한 관심사나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청년센터에서 센터장을 맡게 된 김현두씨(42)는 “대기업을 지역에 유치해 인구를 끌어들이겠다는 둥, 몇백명을 유입하겠다는 둥 하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고 했다. 그는 지역에 천천히 애정을 쌓아가는 ‘관계 인구’를 늘리는 게 우선이라고 봤다. “한 달 살기든, 놀러 오든, 왔다 갔다 하며 지역에 애정이 생기다보면 정착도 고려하게 되는 것 아니겠나.” 김씨가 말했다.
“금전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우리 지역이 더 나은, 살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앞으로도 재미있게 살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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