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기록부, 떼본 적 있으신가요? 정부24에 들어가면 누구나 자신의 학생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생부는 평생 남는 학창 시절의 소중한 기록이자 대학입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학생부에 다른 사람의 내용을 복사해 붙여 넣었다면 어떨까요?
이런 믿기 힘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2월 대구 한 고등학교에서 적발된 일입니다. 1학년 담임교사 A 씨는 2023년 자신이 맡은 학생들 22명 전원의 학생부 '행동특성란'에 2022년 자신이 담임을 하며 작성했던 다른 학생들 자료를 통째로 베껴 제출했다 들통이 났습니다. 이 교사는 2월 말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이 일정에 쫓겨 작성 시간이 부족했다는 황당한 이유를 댔습니다.
대리 수정도 사주했습니다. 해당 교사는 자신의 행동이 문제 될 것을 우려해 여행 도중 다른 교사에게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해 대신 수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시스템상 다른 사람은 접속이 불가능해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학생부 마감 기한인 2월을 넘기면서 수정이 불가한 3월이 됐고, 결국 해당 학생들의 학생부에는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생뚱맞은 내용이 기재됐습니다.
■ 고쳐주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아니요. 일단 원칙적으로 지난 학년도의 학생부 정정은 불가합니다. 학생부 조작을 통한 입시 비리 등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제한적으로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생부 정정은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제 19조에 따라 '객관적인 증빙 자료'가 있는 경우 학교 학업성적관리위원회의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교육청에 이 일이 알려지고 학교는 위 절차를 거쳐 학생부를 정정했습니다.
문제는 정정 내용이 제한적이란 겁니다. 해당 교사가 복사·붙여넣기 한 '행동특성란'은 교과 성적만으로 알기 힘든 학생 평가가 주된 내용입니다. 이 때문에 성격이나 태도, 학급 기여도 등의 주관적인 평가는 삭제만 가능하고, 추가로 기재할 수 없습니다. 원칙에 맞게 정정하려면 간단한 사실 위주의 정량적인 내용만 기재 가능합니다.
그런데, 해당 학교 교장은 "정정 시 해당 학생들의 학생부에 '정성 평가' 부분도 정상적으로 모두 기재해 문제없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교육부는 '학교가 학생부를 정정하면서 기재 불가한 내용들까지 잘못 정정한 건 아닌지 감사를 통해 확인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학생부 정정 대장은 꼬리표처럼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이럴 경우 생길 수 있는 피해는 오롯이 학생 몫으로 돌아갑니다.
"학생부는 객관적 증빙자료 있는 경우에만 정정이 가능하므로 정정되는 내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재 오류 사안에 따라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김한승/교육부 교실혁신지원과장 |
■ 학교는 왜 교사를 징계하지 않았나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난 건 학교 측의 미온한 대응 때문입니다. 1년이 되도록 아직 학교 재단 측은 이 교사를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대구교육청이 당시 대규모 학생부 정정 사태를 인지하고 빠른 정정 조치와 함께 교사 징계를 권고했지만, 학교는 내부 사정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왔습니다.
이번 사건은 교사가 최대 파면까지 이뤄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학생부 입력 마감 기한 전 입력 완료하지 못한 것, 학생 개별 특성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내용을 기재한 점 등 이는 초중등교육법 제25조 및 교육부훈령 제477호 학생부 작성 및 관리지침 위반이자 성실의 의무 위반입니다.
특히 교육공무원 징계양정 등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학생부 허위 사실 기재와 부당정정(이전 학년도 학생부를 객관적인 증빙자료 없이 정정하는 것)은 시험문제 유출이나 성적 조작 등 학생 성적과 관련한 비위와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하지만 학교는 교사를 감싸기에 바빴습니다.
"이 경우는 순수하게 그 당사자의 실수로 보고 있습니다. 해당 선생님은 교과 과목이 가르치는 반수가 많다 보니까…." -대구 00고등학교 교장 |
다른 교사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대부분 교사는 학생부 마감인 2월 이전 수 개월간 학생부 작성에 온 힘을 쏟는 데, 문제의 교사가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은 결국 업무를 마친 것처럼 의도한 행동이라는 겁니다. 바빠서였다면 차라리 공란으로 놔둬야 했다고 지적합니다.
“대부분 선생님은 방학이 되면 두 달간 창작의 고통을 받으며 학생들 하나하나 개별 특성에 맞게 기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교사 전체에 대한 인식이 악화할까 굉장히 힘이 빠지네요.” -김봉균/경북대사대부고 교무부장 |
■ 학교는 어떻게 징계를 이행하지 않고 일 년간 묵인이 가능했을까요?
관리 주체인 대구교육청 때문입니다. 교육청은 지난해 2월 이를 인지하고도 감사를 실시하지 않고 장학사의 '구두' 징계 권고로 그쳤습니다.
학교가 교육청으로부터 '감사'를 통한 징계 지시를 받으면 90일 안에 이행해야 합니다. 이행하지 않으면 교육청은 학교에 행정처분과 징계 등을 내릴 수 있는데요. 감사를 실시하지 않아 징계 기한을 강제할 근거도 없던 겁니다.
교육청은 해당 교사가 초중등교육법 제25조 및 교육부훈령 제477호 '학생부 작성 및 관리지침'을 위반했다면서도, 사립학교라 적극적인 조치를 하기 어려웠다고 해명했습니다.
"우리가 사립 학교에 대한 인사권은 없기 때문에…(학교 잘못이) 명백한 거였기 때문에 별도로 감사를 요청할 그럴 필요는 없다…." -서정은/대구교육청 장학관 |
■ 정말 교육청은 심각한 사안인지 몰랐을까요?
반전은 교육청 연수 자료에 있습니다. 지난해 교육청은 학생부 담당 교원 연수자료에 버젓이 이 사건을 문제 사례로 소개해 놨습니다. '학생부 신뢰도 제고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부 신뢰를 떨어뜨린 4개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됐습니다.
연수자료에는 해당 건에 대해 학생부 정정 불가 시 학생에게 피해가 간다는 점과 정정 시에도 대학에 전송되는 정정 대장이 남는 점을 모두 문제로 꼽았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학생에게 피해가 간다는 점을 알면서도 한 차례 징계만 권고했을 뿐, 관리·감독에 손을 놓고 있던 겁니다.
■ 불안에 떠는 학생들, 분노한 학부모 단체
보도 이후 학생들에게 여러 건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개별 학생뿐 아니라 전교 부회장과 1~2학년 학생 일동 등 단체 입장을 담은 메일들이었는데, 혹여 자신들이 피해 학생인지 묻는 걱정들이었습니다. 교육청과 학교가 사태 해결에 미적거리는 사이 학생들의 피해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분명 "구두로 피해 학생들에게 알렸다"고 했는데, 어째선지 문의는 계속 들어옵니다.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을 가려는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교내 소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소문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제 담임선생님의 이름도 거론됩니다. 현재 이에 대한 확답이 절실합니다. 당사자가 어느 선생님이신지 기자님께 문의합니다." -대구 모 고등학교 학생(익명). |
학교는 학부모들에게는 학생부 정정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학부모 단체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세게 비판했습니다.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최상위권 학생들은 학생부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거든요. 제가 학부모라면 민형사상 소송을 할 거예요. 내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좋은 성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고 있던 학부모라면 특히나." -문혜선/대구참교육학부모회 상담실장 |
■ "터질 게 터졌다" 고질적인 학생부 논란
취재하며 알게 된 점은 비단 학생부 기재를 둘러싼 논란이 이뿐만이 아니란 겁니다. 대구에선 학생의 희망 진로를 엉뚱하게 기재하거나 계약이 해지된 기간제 교사가 학생부를 작성한 사례도 나왔습니다.
일부 학교에선 학생이 학생부 내용을 적어 오면 교사가 일부만 바꾸는 방식으로 학생부 작성이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암암리에 교사들도 컨설팅 업체에서 (학생부를 작성)해 오면 내가 거기다 사인해 줄게, 조금 첨삭해 줄게…." -문혜선/대구참교육학부모회 상담실장 |
특히 이번 사건처럼 교사의 과실 등으로 인한 학생부 정정은 결국 학생부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집니다.
교육부가 김영호 국회 교육위원장실에 제출한 '학생부 정정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교사 과실이나 학생 요구로 학생부를 정정한 사례는 지난해 전국적으로 31만 6000건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 창의적 체험활동(24%)과 세부 특기사항(16%), 행동특성(6%) 등 주관적 평가가 들어가는 항목이 46%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습니다. 수시 비중 확대와 자기소개서 폐지로 위 세 가지 정성 평가 항목들은 대입, 특히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주요 참고 자료로 활용됩니다.
대입에서 학생부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기재 오류와 잦은 정정, 학생과 학부모 불만이 잇따르면서 학생부 작성 실태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교사 연수, 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 교사들을 중심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 뉴스는 선생님들한테도 굉장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저희를 다시 보는 거죠. 혹시라도 내가 실수한 부분이 있나. 재발 방지라는 게 함께 검토하고….” -김민정/대구고 교무부장. |
■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감사 나선 대구 교육청
KBS의 취재가 시작되자, 일 년이나 묵인된 사건은 아주 빠르게 후속 조치가 나왔습니다.
지난달 13일 첫 보도가 나가자 학교는 곧바로 징계 조치를 내리겠다고 했고, '감사가 필요 없다'던 대구 교육청은 특별 감사에 돌입했습니다. 대구 교육청은 특별 감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해당 학교에 징계와 행정처분을 내릴 방침입니다.
여기에 교육청은 추가 조치로 2월 한 달간 대구의 모든 고등학교 99곳과 중학교 127곳을 대상으로 학생부 작성 실태에 대한 현장 점검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달 3일에는 대구 지역 고등학교 학생부 담당 교사와 장학사 250여 명을 불러 학생부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특별 연수도 실시했습니다. 이 같은 교육청의 조치는 KBS의 보도 이후 강은희 교육감의 특별 지시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근본적으로 이번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관련 제도가 개선될 전망입니다. 교육부는 이번 사건과 같이 교사 과실로 학생부를 정정하는 경우, 학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구제 방안을 다음 주 발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학생부 정정 시 객관적인 증빙 자료가 있는 객관적 사실 등 정량적인 내용만 추가 기재할 수 있는데, 이를 변경해 교사의 과실일 경우 성격, 태도 등 정성적인 내용도 기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입니다.
교육부는 전국 교육청에 개선안을 반영한 신규 학생부 관리 지침을 공표할 예정입니다. 또 이번 사태로 학생부가 정정된 해당 학교 학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구제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학교나 교사의 명백한 과실에 의해 학생부 기재가 잘못된 경우 학생이 대입 등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교육부는 이에 대한 제도 개선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김한승/교육부 교실혁신지원과장 |
국회도 이번 사건을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관련해 보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입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학생부는요. 대학 입시에도 매우 중요하지만, 평생 아이들이 가져가야 할 학창 시절의 평가기록이기도 합니다. 정말 신중하고 자신의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꼼꼼하게…. 교육부는 (이번 건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서 밝혀야 하고요." -김영호/국회 교육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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