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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습격, 인간의 반격] ②한국 콜센터의 분노
일러스트 김재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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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씨 하나 안 틀리게 받아 쳐라.”

2017년, 한 시중은행 하청업체 소속 6년차 콜센터 상담사였던 김아무개(50)씨는 업체 관리자 지시로 매일 퇴근 뒤 한시간씩 추가 근무를 했다. 낮 동안 고객과 나눴던 상담 대화 녹음을 다시 듣고 일일이 받아 치는 작업이었다. “상담사들에게 도움 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라는 관리자 말에 김씨와 동료들은 사무실에 남아 상담 녹음을 텍스트로 바꿔나갔다. 추가 수당 없는 ‘그림자 노동’은 5개월 동안 지속됐다.

“하청업체 관리자는 ‘은행에서 하라고 하니까 그냥 하라’는 식이었어요. 원청에서 요청하면, 하청업체는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요. 얼마 정도 지나니까 정말 상담 모니터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글자로 바뀌어 나타나는 챗봇 화면이 하나 생기더라고요. 그걸 보고 상담사들끼리는 웃으면서 그랬죠. ‘이거 우리가 훈련시킨 거네’라고요.”

김씨와 동료들이 훈련시킨 건 상담사들과 고객들의 음성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음성인식·합성(Speech-To-Text·Text-To-Speech, STT·TTS) 기술’이었다. 2018년 하나은행은 인공지능(AI) 금융비서 ‘하이(HAI)뱅킹’ 서비스를 새롭게 개편하면서, 음성인식·합성 기술을 새로 추가했다. 하나은행은 당시 “딥러닝 대화형 인공지능 엔진이 새롭게 탑재돼 고객의 말을 한층 더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고 똑똑하게 응대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때는 하나은행을 포함한 케이비(KB)국민·신한 등 주요 시중은행들이 상담사들과 고객들의 대화 내용을 활용해 업무 자동화, 데이터 수집을 위한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 구축에 주력하고 있었다. 상담사의 목소리와 말투를 녹음한 음성, 이를 텍스트로 변환시킨 데이터는 기술 고도화를 위한 ‘핵심 원천’이었다.

현재 시중은행을 포함한 기업들은 상담사와 고객들의 대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녹음해 챗봇 기술 고도화에 활용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겨레에 “2018년 즈음 챗봇 개발 초기 단계에서 하청업체 쪽에 구두로 ‘텍스트화한 음성 내용 중 오탈자가 있으면 정정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긴 하다”며 “업체 쪽에 상담 대화 녹음을 아예 텍스트화하는 작업을 지시한 적은 없고, 지금은 고객-상담사 대화 내용 녹음을 통해 챗봇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겨레는 지난 4월17~24일 약 1주일 동안 전국 은행·카드사 등 콜센터 상담사 18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를 보면, 전체 90%에 이르는 상담사들은 현재 자신이 근무하는 콜센터에 ‘챗봇 등 인공지능 기술이 도입됐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상담사들 절반 가까이(약 44%)가 김씨처럼 ‘원청 또는 하청의 요구로 정해진 콜센터 업무 외에 음성인식·합성 기술 등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를 위한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이들 중 대부분(86%)은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를 위한 추가 작업을 한 뒤 업체로부터 정당한 보상이나 대가를 받은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해당 작업의 목적 등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는 상담사들도 63%에 이르렀다.

상담사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나 말투에 고스란히 담긴 상담 ‘노하우’를 기업들이 인공지능 고도화를 위해 무단으로 활용하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줄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은행 하청업체 소속 9년차 콜센터 상담사인 권금정(51)씨도 그중 한명이다. 국민은행은 ‘인공지능 서비스 고도화’ 등을 이유로 들며 상담사 인력을 줄여나가고 있다.


권씨는 “업무 현장에 쓰이는 인공지능 기술은 초기에는 많이 미흡했지만, 상담사들의 음성 데이터 등이 활용되면서 지금은 아주 똑똑해지고 자연스러워졌다”며 “기업은 상담사들의 업무 스킬, 노하우를 한번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가져다 쓰고, 심지어 나중에는 상담 내용이 텍스트화가 잘되는지 확인해달라고까지 요구한다”고 말했다.

12년째 상담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50)씨의 말이다. “경험이 풍부한 숙련 상담사들은 다양해진 고객 민원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고객들이 장황하게 설명해도, ‘아 이걸 물어보시는구나’ 빨리 파악한 뒤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고, 종합해 궁금한 점들을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죠.” 그는 “챗봇이나 인공지능 자동전화 서비스가 갈수록 디테일하게 발전되고 있는 걸 보면, 상담사들의 노하우들을 인공지능이 계속 습득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콜센터 상담사 이아무개(48)씨도 “업무 현장에선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깝습니다만’ 같은 고객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게 하고 차분히 대응할 수 있는 ‘쿠션어’라고 불리는 표현, 말투가 있는데 이런 노하우들은 그동안 상담사들이 매번 실적 평가받으면서 익혀왔던 노하우다. 이게 그대로 인공지능 상담 기술에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들처럼 실제 설문조사에 참여한 상담사들 절반 이상(51%)은 ‘챗봇, 자동전화, 음성인식·합성 등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에 상담사들의 노하우가 활용된다’고 답했다. 또한 기업이 상담사들의 노하우를 사전 동의나 정당한 보상 없이 무단으로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64%에 이른다.

한편, 금융권 외에도 이동통신사 등 초거대 인공지능 모델을 개발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은 기업들은 현재 인공지능 고객응대 시스템(AI Contact Center, AICC)을 중심으로 한 기업 간 거래(B2B) 시장을 주목하고 있다. 현장 콜센터 상담사들의 피드백을 통해 인공지능 오류(할루시네이션)를 줄여나가는 등 비교적 기술 개발 비용 부담이 적어 사업 가치가 높다는 판단에서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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