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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A씨는 최근 유언대용신탁 가입을 상담받으면서 은행에 "사망 후 남은 재산의 5분의 4를 손녀가 받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이 요양병원에 있는 동안 아들 부부는 부모의 건강에 무심했다. 대신 매주 요양병원을 찾아와 자신을 위로해준 가족은 대학생 손녀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A씨는 "아들 부부가 부양 의무는 제대로 지지 않고, 부동산 자산에만 욕심을 내는 것 같다"며 "더 늙어 판단이 흐려지기 전에 손녀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A씨처럼 은행에 상속 절차를 맡기는 유언대용신탁의 상품 규모가 1년 사이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언장을 쓰지 않더라도 사후에 재산을 안정적으로 분배해, 각종 상속분쟁을 방지하고자 하는 수요가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빠른 고령화로 유언대용신탁 시장은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5대 시중은행(KB국민ㆍ신한ㆍ하나ㆍ우리ㆍNH농협)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3조3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2조3000억원) 대비 43%나 증가한 수치다. 2020년 말 8800억원에 불과하던 수탁 규모는 매년 가파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김영희 디자이너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위탁자)이 금융사 등(수탁사)에 재산을 맡긴 뒤 배우자‧자녀 등(사후수익자)에게 이전하는 상품이다. 위탁자 생전에는 본인이 직접 재산을 빼서 쓰고, 사후에는 재산을 수익자에게 언제 어떻게 지급할지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다. 예컨대 '첫째 아들이 60세가 될 때까지는 매월 얼마를 지급하고 60세가 된 이후에는 목돈으로 지급하라', '특정 재산은 둘째 아들에게만 지급하라' 등을 생전에 미리 지정해두는 것이다.

김경진 기자
유언장을 쓰지 않고도 상속을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유언대용신탁의 장점으로 꼽힌다. 유언장은 민법상 요건을 빼먹거나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효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필로 쓴 유언장에 날짜·주소·성명·날인 중 하나라도 없으면 무효가 되는 식이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와 수탁사가 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라, 별도 유언장 없이도 위탁자가 생전에 설계한대로 재산이 분배될 수 있다.

사후 상속 과정에서 자녀들 간 갈등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도 크다. 상속 관련 법적 분쟁 건수는 지난해 2776건으로 2021년(2379건)에 비해 증가하는 등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에는 장남에게 유산이 몰려도 용인하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자신의 몫을 충분히 찾겠다는 경우가 늘면서다. 유언대용신탁으로 고인의 뜻을 분명하게 정해두면, 수탁사가 계약에 따라 재산 분배까지 마무리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최근엔 부동산 자산 가치가 크게 급등하면서 유족들이 매각 시기 등을 두고도 갈등하는 경우도 많은데, 유언대용신탁은 고인이 생전에 부동산 처분 시기와 방법 등까지 미리 정해둘 수 있다.

김하정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고령 독신 가구, 자녀가 해외에 사는 가구 등은 건강이 안 좋아진 노후를 대비해 대리인을 사전에 지정해둬 재산을 본인의 병원비‧요양비‧간병비‧생활비 등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며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장년층, 재혼 가정 등으로 고객층이 다양해지고 사후 유산을 기부하기 위해 신탁을 찾는 고객도 있다”라고 전했다.

관심이 커지자 시중은행도 상품 다양화에 나서는 추세다. 하나은행은 상속 집행 등을 돕는 유산정리 서비스를 출시했고, KB국민은행은 금 실물을 상속하거나 증여할 수 있는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내놨다. 신한은행은 올 4월 유언대용신탁 전산화 시스템 구축을 통해 사업 확장에 나섰고, 우리은행은 유언장 보관서비스를 도입한 바 있다.

이경훈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일본은 2007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뒤 2013년에 상속신탁이 대중화됐다”며 “2025년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는 한국도 2031년부터 상속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부상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미 ‘다사사회(多死社會, 고령층 비중이 높아지면서 사망자가 급증하는 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선 이미 다양한 신탁 상품이 자리 잡은 상태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던 주인이 사망할 경우 수탁사가 맡고 있던 양육자금을 새 주인에게 지원하는 ‘펫(pet)신탁’, 조부모의 재산을 수탁사가 관리하다 손자녀의 교육자금이 필요한 시점에 지급하는 '교육자금증여신탁' 등이다. 박지홍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에선 부모 재산을 상속받은 자녀들이 거래하는 도심 대형은행으로 금융자산이 집중된다는 생각에 지방은행이 상속 비즈니스를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며 “향후 한국에서도 다양한 상품‧서비스 라인업이 확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영희 디자이너
한국에선 유언대용신탁이 조금씩 정착하는 시기인 만큼 계약 시 유의할 점도 적지 않다. 유언대용신탁으로 재산을 이전했다고 해서, 유족들 간 유류분(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족들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산 비율을 법으로 정해둔 것) 분쟁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다. 유언대용신탁 수익자가 아닌 가족이 자신의 유류분을 요구할 경우, 수익자가 신탁계약에 따라 받은 재산까지 유류분 반환 대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대법원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

남은 가족들이 신탁 계약 자체가 무효라고 수탁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상속 분쟁이 과열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는 “유언대용신탁으로 맡긴 재산에서 수탁사의 소송비용까지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법적 분쟁이 과열되면 상속 재산만 줄어드는 셈”이라며 “여러 리스크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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