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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평화바람 활동가.


산으로 둘러싸인 밀양은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765Kv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인 산 아래에 세워진 농성장에는 할머니 두어분이 계셨다. 늦은 밤 촛불 하나 켜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머니들은 강정 활동가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부모님이 걱정하겠다고 염려의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국회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할까봐 대본을 써서 연습을 했던 일, 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면서 점점 투사가 되어가고 있는 일을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다 온몸으로 밀양의 비극을 말했던 이치우 어르신 이야기가 나오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강정과 밀양은 소중한 삶의 터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 밤이었다. 2012년 10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강정주민, 용산참사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제주를 출발해 전국을 돌며 ‘우리가 하늘이다’고 외쳤던 ‘SKY공동행동’이 밀양을 방문했던 날의 이야기다. 밀양을 더해 ‘SKYM’으로 송전탑 반대운동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강정이나 밀양이나 깊은 한숨과 절망 속에 맨몸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시작됐다. 강정에서는 매일 벌어지는 해군기지 공사 저지 투쟁을 하며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날이 이어졌다. 2014년 6월 11일 밀양 행정대집행 소식이 전해졌다. 매일 싸우고 있는 강정을 떠나 밀양으로 갈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밀양 주민들의 굳건한 투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지만 그 비명 소리를 차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2012년 구럼비 발파 날, 새벽부터 마을을 때리던 사이렌 소리가 밀양에서도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해군기지 공사장 펜스에 ‘강정, 밀양 우리 모두의 마을입니다’라고 쓰고 밀양주민들과 연대자들의 안전을 기도하며 마음만 보내고 말았다.

먼저 강정을 찾아주신 건 언제나 밀양 어른들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이들이 도착하지 못한 제주에 왔을 때도 2018년 국제관함식 반대투쟁을 할 때도 강정에 오셔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경찰에 맞섰다. 경찰만 보면 절로 목소리가 높아진다던 할머니들의 마음에 맺힌 말은 얼마나 많을까. 그 마음이 가슴 아팠다. 매년 강정마을 할망물 식당으로 당도하는 밀양 홍시를 받아먹으며 ‘감 따러 가야 하는데’ 하다 끝내 가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2022년 봄날, 탈핵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가 속절없이 시간만 보낸 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던 때 ‘봄바람순례’라는 이름으로 밀양을 방문했다.

완공된 송전탑을 처음 봤을 때엔, 2016년 해군기지 완공을 앞두고 공사현장을 가로막고 있던 펜스가 치워졌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막아내지 못한 폭력의 결과물이 우리 앞에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강정사람들이 느꼈던 상실과 삶을 짓누르는 무력감이 송전탑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졌다. 창문을 열어도, 길을 걷다가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어디서나 송전탑을 마주하는 일상을 살며 밀양주민들은 얼마나 가슴을 치고 있을지 숨이 막혀왔다.

누군가는 해군기지가 다 지어졌으니, 송전탑이 다 지어졌으니 이제는 잊고 지내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하지만 국가폭력이 훑고 지나간 마을에 산다는 것은 매일 폭력의 결과물을 마주하며 떠나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일이다. 송전탑을, 해군기지를 볼 때마다 되새겨지는 지난날의 고통을 언제쯤 잊을 수 있을까. 밀양주민들은 몸에 각인된 폭력의 기억에 굴하지 않고 한전에 맞서 합의하지 않은 채 밀양 곳곳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현재진행중인 핵 발전과 새롭게 지어질 송전선로를 마주하게 될 이웃마을을 살피고 연대하며 싸우고 있다. 행정대집행은 소박한 농성장을 쓸어가고 송전탑을 세웠지만 부당한 권력에 맞서고 눈물을 타고 흐르는 부당한 에너지 정책에 맞서는 마음만큼은 쓸어가지 못했다. 10년의 시간은 끝까지 싸우겠다던 자신의 말을 지키며 부당함에 맞서온 인간의 존엄이 써 내려간 시간이다. 그 빛나는 이야기가 밀양의 친구인 당신을 기다린다. 6월 8일 다시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에서 만나자. 딸기(평화바람 활동가)

밀양 행정 대집행으로 주민 농성장이 철거된 지 10년이 지났다. 두 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지만 송전탑은 예정대로 설치됐다. 마을 어디에서도 보이는 100m 높이의 송전탑은 지금도 소음과 빛을 내뿜고 있다.

아직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행정 대집행 10주년을 맞아 송전탑 옆에 서서 기후위기, 핵발전, 국가폭력에 맞서는 이들의 목소리를 5회에 걸쳐 게재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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