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망명 생활의 경험을 담은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77세.

홍세화씨(왼쪽에서 세 번째) 프랑스 망명 20년 만인 1999년 고국 땅을 밟을 당시의 모습. 중앙포토

장발장은행과 지인 등에 따르면 홍 은행장은 이날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1947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고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했으나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고 우여곡절 끝에 1977년 졸업했다.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중앙포토

1979년 발생한 남민전 사건이 그의 프랑스 망명 계기가 됐다. 고인은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업해 프랑스에서 일하던 중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장기간 귀국하지 못했다.

남민전 사건은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한 이재문 등이 1976년 결성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라는 지하 조직이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것을 공안 기관이 문제 삼으면서 80여명이 체포된 사건이다. 당시 고인은 남민전 조직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고인은 1970년대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계기로 남민전에 가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프랑스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1995)를 출간해 '톨레랑스'(관용)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한국 사회의 변화와 성찰을 촉구했다. 책은 곧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대해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것으로, 관용보다 용인에 가깝다"고 말한 바 있다. 1999년 출간한 문화 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고인은 망명 약 20년 만인 1999년 일시 귀국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도시 전체가 인간적 정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철학만 가졌다면 한강을 파리의 센강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박정희 정권의 성장 우선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귀국 이후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을 맡으며 활발하게 저술·논평 활동을 했고 진보 진영의 대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에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역임했고, 2011년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2013년에는 인문사회 계간지 ‘말과 활’ 창간호를 내고 발행인을 맡았다. 2015년에는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할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을 설립했다.

고인의 대표작인『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표지. 프랑스에 망명해 관광 안내, 택시 운전을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다. 사진 창비

그가 남긴 저서로는 『아웃사이더를 위하여』(2000),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2002), 『홍세화의 공부』(2017)『능력주의와 불평등』(2020·공저),『결:거칢에 대하여』(2020), 『생각의 좌표』(2023) 등이 있다.

지난해 1월 한겨레신문에 마지막으로 실린 홍세화 칼럼의 제목은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였다. 그는 칼럼에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라고 썼다.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선 씨와 자녀 수현·용빈 씨가 있다. 장례는 18~21일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중앙일보

홍지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