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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고 해서 긍정적인 변화가 보장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이번 선거로 윤석열 체제가 한계에 직면한다면 한국 정치는 역동적인 재편의 과정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이제 문책의 시간이 왔다. 그 뒤엔 변화의 시간이 온다.
22대 총선 사전투표 둘째날인 지난 6일 오후 인천 연수구 송도1동 행정복지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인천/연합뉴스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정에서 어떻게 하면 정부가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를 학자들은 ‘문책 가능성’(accountability)이라고 부른다. 책임성, 책무성이라고도 하는데, 이 개념의 핵심은 책임 자체에 있다기보다, 정부의 행동과 정책이 문제가 될 때 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잘못이 있으면 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정부에 대한 문책은 국회나 법원에 의해서도 이뤄지지만, 무엇보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과 징벌에 의해 달성된다. 지금 우리 국민은 무엇을 문책하려 하는가?

이번 총선은 정책 경쟁도, 미래 비전도 없이 상호 비방만 하는 여야 특권층의 권력다툼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행태만 본다면 그 진단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만약 그게 전부라면 정치 환멸이 이 선거의 키워드가 돼야 했다. 그런데 실제는 그와 반대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무당층 비율은 20대, 21대 총선보다 낮고 사전투표율은 역대 최고다. 이 민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이번 선거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동안 다양한 여론이 확인되었지만, 이번 선거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민심의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 정서일 것이다. 일시적 예외 국면을 제외하면 정부 견제 여론은 지원 여론보다 꾸준히 5~10%나 높았고, 윤 대통령은 전국을 돌며 지원 공약을 하고 다녔는데도 국정 수행 부정평가율은 60%에 이른다. ‘3년은 너무 길다’는 슬로건으로 등장한 조국혁신당의 돌풍은, 그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이번 선거의 가장 인상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이런 심판론의 열기는 우리 정치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현실을 방증한다. 하지만 심판 여론을 단지 증오정치나 복수극 정도로만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야당들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이 윤석열 정부 심판을 최우선시하는 데에는, 무능한 권력의 횡포를 멈춰야 한다는 절박함, 이 벽을 깨뜨려 비로소 변화를 개시하자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국민들이 왜, 무엇을 심판하려는지가 중요하다.

지난 수개월 동안 한국갤럽 정례조사 결과를 분석해보면 대통령 국정수행 부정평가의 이유로 일관되게 세가지가 최상위에 있다. ‘경제/민생/물가’, ‘독단적/일방적’, ‘김건희 여사 문제’가 그것이다. 설문 조사지에 적힌 이 건조한 문구들 옆에 붙은 높은 응답률은 지금 우리 사회를 속박하고 있는 정치적 질곡, 달성해야 할 역사적 과제에 대한 시민들의 절망과 열망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첫째는 노동자·서민을 희생시키는 경제 현실을 바꾸고 국민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할 제도적 개혁이다. 둘째는 국가와 정치권력의 남용을 막고 시민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정착이다. 셋째는 법을 무기로 국민을 옥죄고 정권을 보위하지 못하도록 권력구조를 분산하고 진정한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 민주국가, 법치국가라는 현대의 근본 가치가 아직도 구현되지 못했다. 바로 이 객관적인 역사 발전의 지체가 정치 발전을 구속한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 기후위기, 국제환경 변화 등 현 시대의 도전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사람들의 ‘관념’이 구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오래된 근본 과제들이 유예되거나 심지어 후퇴하여 낡은 대립축이 자꾸만 다시 부상한다는 데 있다. 이 역사의 문턱을 넘어서기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과정에서 다른 많은 동시대의 의제를 확장할 공간이 열린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정치적 심판과 시민 주권의 재확인이 다른 많은 사회적 진보를 위한 촉발제 역할을 했다. 1960년 4·19혁명 뒤에 남북평화의 외침이, 1987년 6·10항쟁 뒤에 노동자 대투쟁이, 2008년 촛불집회 뒤에 수많은 생활민주주의 공동체들이 건설되었다.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한다고 해서 그 뒤에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보장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이번 선거로 윤석열 체제가 한계에 직면한다면 한국 정치는 역동적인 재편의 과정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흐를 수 없게 막아 가둔 벽 안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벽에 금이 가는 순간 강물은 스스로 터져 나온다. 그 물이 어디로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미래가 없다 해서 냉소와 무기력에 빠져 있는 세상보다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몸부림치는 세상이 낫다. 이제 문책의 시간이 왔다. 그 뒤엔 변화의 시간이 온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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