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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교정학원에 저학년 초등생 몰려
변호사 시험도 컴퓨터로 치르는 시대
문해력 회복 위해 '쓰기' 가치 재발견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글씨교정 학원에서 한 학생이 영어 단어 필기 연습을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엄마가 글씨 못 쓴다고 여기로 데려왔는데, 지금은 제가 반에서 제일 잘 써요."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글씨교정 학원. 조용한 분위기 속에 중년 남성과 20대 대학생 사이에서 초등학생 서넛이 고사리손에 연필을 쥔 채 한글과 영어 단어를 줄줄이 적어나갔다. 모두 연습장에서 눈을 뗀 채 정면을 응시하며 손의 감각만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초등학교 3학년 A양은 본인이 쓴 글씨가 뿌듯한 듯 기자에게 보여줬다. "삐뚤빼뚤 제각각이던 글씨가 가지런하게 정돈돼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허리를 굽혀 쓰던 자세가 교정된 건 덤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로 불린다. 태어날 때부터 연필보다 스마트폰이 더 익숙할 만큼 첨단기기 환경에 쉽게 적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근 이들 사이에서 손글씨와 쓰기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문해력 부족과 쓰기 능력 저하 등 디지털 확산에 따른 부작용이자, '느림'의 가치를 되돌아보려는 반작용으로 해석된다.

디지털 부작용... 조기교육 대상 된 손글씨

한 초등학생이 교정을 받기 전(왼쪽 사진)과 교정 후 쓴 글씨. 한눈에 보기에도 바뀐 글씨가 정돈돼 있다. 참바른글씨 제공


이날 찾은 강남 일대 글씨교정 학원 두 곳에선 두 가지 흐름을 엿볼 수 있었다. 원생이 눈에 띄게 늘고, 연령대도 낮아졌다는 점이다. 원래 중학교 진학을 앞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이 부모 손에 이끌려 글씨를 배우러 왔는데, 이젠 저학년 자녀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명필이 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허리를 일직선으로 펴고, 연필을 바로 쥐는 파지법만 익히면 된다. 엄지와 검지로 연필심에서 2.5㎝ 떨어진 곳을 가볍게 쥐고 중지의 첫 번째 마디로 연필 아랫부분을 받치는 식이다. 연필과 손의 각도는 10시 방향이 가장 좋다. 유성영 참바른글씨 대표는 "현재 수강생 70% 정도가 저학년 초등학생"이라며 "선행학습이 확산되다 보니 어릴 때부터 글씨 교정하는 아이들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학원 관계자는 "유치원에 다니는 6, 7세 아이들도 더러 있다"고 귀띔했다.

만족도는 높다. 글씨 교정을 받은 지 2개월 된 초등학교 6학년 B군은 "글씨를 바로 쓰게 되고 엄마가 칭찬도 해줘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학부모 김모(41)씨도 "예전엔 손이 아파 글씨를 오래 쓰는 것조차 힘들어했는데, 공부 집중력까지 올라간 것 같다"고 흡족해했다.

손글씨까지 사교육 대상이 된 건 갈수록 디지털 쓰임새가 넓어지는 탓이 크다. 가령 올해 1월 치러진 변호사시험에서는 국가시험 최초로 논술 답안을 컴퓨터로 작성하는 CBT 방식이 도입됐는데, 응시자의 99.2%가 필기가 아닌 CBT 방식을 택했다. 실용성 측면에서 '쓰기'의 중요성이 줄어든 일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편리함이 전부는 아니다. 빠르고 쉽기만 한 학습 환경은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 저하를 초래했다. 이렇다 보니 '악필'로 고생하던 고시생이 찾던 글씨교정 학원이 문해력 발달을 위한 '조기교육'의 장으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유 대표는 "스마트폰은 '터치' 방식이라 촉각을 키우기 어려워 악필이 늘었다"면서 "소근육을 이용해 미세한 힘을 구분하는 것이 글씨 교정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다시 블로그... 온라인서도 '쓰기' 열풍

2022년 1월 12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변호사시험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시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다른 나라들도 손글씨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스웨덴은 유치원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의무화했던 기존 방침을 백지화하고 종이에 글을 쓰는 교육을 하기로 했고, 캐나다 등에서는 쓰기 수업을 필수 과정으로 복원하는 등 탈(脫)디지털화 교육에 힘쓰고 있다. 고전연구자인 박수밀 한양대 연구교수는 "손글씨 안에는 따뜻한 감성과 풍성한 학습 효과가 담겨 있어 생각하는 힘과 함께 차분한 정서도 키우게 된다"고 강조했다.

쓰기는 온라인 공간에서도 점차 세를 불려가고 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다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밀려 인기를 잃었던 블로그의 부활 조짐이 대표적이다. 네이버에 따르면, 지난해 신설된 블로그는 126만 개로 새 게시 글은 2억6,000만 개에 이른다.

블로그는 긴 호흡을 통해 글을 작성하고 진솔하게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등 차별화한 기록의 가치가 있다. 빠름이 대세가 된 현실에서 잠시 쉬어 가는, 쉼표로서의 힘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 열풍을 디지털 네이티브인 2030세대가 이끄는 점에서도 그렇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짧은 콘텐츠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아날로그 정감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글씨교정 학원에서 한 수강생이 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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