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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 때다. 당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자단과의 정책세미나 자리에서 갑자기 이 시를 낭송했다. 윤 장관은 “힘들 때마다 한 번씩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서비스산업 선진화 추진 계획을 묻는 기자단 질문에 이 시구를 다시 읊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흔들리기만 하고’ 피우지 못한 꽃
한·미 FTA와 은산분리 완화처럼
진보가 보수 어젠다 해결 어떤가

지난주 한국은행이 발표한 서비스산업 보고서를 보면서 옛날 생각 많이 났다. ‘서비스산업’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도종환의 시와 군만두가 떠오른다. 군만두는 당시 기재부 관료들 대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중국집에 요리를 주문하면 으레 군만두 ‘서비스’가 따라오곤 하는데, 이런 ‘서비스=공짜’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관료들은 부르짖었다. 하나 지금도 바뀐 건 별로 없다. 뭐든지 공짜면 귀한 대접을 못 받고 발전이 없다.

‘윤 장관의 꽃’은 끝내 피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처음 발의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하 서비스법)은 15년째 국회에서 공전 중이다. 법안은 서비스산업의 생산성 향상,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전문 연구·교육기관 육성 등을 통해 내수 기반을 확충하고 일자리를 만들며 경제 성장 동력을 확보하자는 게 목표다. 다 좋은 내용인데도 진전이 없었던 것은 ‘의료 민영화’라는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다.

그래서 지금 서비스업은 어찌 됐을까.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서비스산업의 1인당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39.7%에 불과하다. 2005년 이후 20여 년간 이 수준이다. 서비스업은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44%, 취업자 수의 65%를 차지할 정도로 양적으로는 성장했을 뿐, 질적으로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생산성 부진의 구조적 원인은 ‘서비스는 공짜’ 마인드다. 한은 보고서는 “서비스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이라기보다는 공공재나 무상 제공되는 활동으로 받아들여져 온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산업정책이 서비스업을 규제와 공공성 중심으로 접근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꼭 집었다. 보고서의 해법은 명쾌하다. 서비스법으로 법·제도를 정비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야당 시절 반대했던 문재인 정부도 골칫거리인 의료를 제외하는 우회로를 통해 서비스법 시도는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전 보수정권 때만큼 적극적이지 않았고, 보수 야당도 의료 산업화 가능성이 배제됐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힘을 받지 못했다.

성장을 강조하는 실용정부를 표방하는 현 정부에서 서비스법 제정과 서비스산업 선진화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어쨌거나 보수정부가 원했던 보수 의제인 서비스법을 진보정부가 선택하면 그 자체가 협치 실천의 상징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처럼 좋은 유산이 될 것이다. 둘째, 과거 정부의 실패는 갈등관리 능력 부족 탓이 컸다. 새 정부는 출범 이후 갈등관리에 적극적이고 자신감도 표하고 있다. 잘할 것 같다. 셋째, 진보 시민단체를 설득하는 데도 보수정부보다 유리하다. ‘뜨거운 감자’였던 인터넷은행의 은산분리 완화도 문재인 정부가 했다. 넷째, 인공지능(AI) 강국과 제조업의 AI 활용에 도움이 된다. 융·복합 서비스 신산업이 규제를 뚫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서비스법에 따라 신산업 진입에 따른 이해관계자 간의 갈등 조정 기구가 만들어지면 규제혁신의 좋은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서비스법은 기재부에만 맡겨두면 힘이 실리지 않는다. 윤 장관도 의료와 교육 등 규제 완화와 관련, 관계부처의 비협조에 “복장이 터진다”고 토로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적극 나서지 않으면 교통정리가 힘들다. 서비스법이 이재명 정부에서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면 윤 장관을 비롯해 감동하는 이가 많을 것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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