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분 3년 반 만에 법원서 취소 확정
“사업 기회 제공, 부당 지원 아냐”
“사업 기회 제공, 부당 지원 아냐”
[밥알못 판례 읽기]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강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7년 LG실트론(현 SK실트론)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과징금 등 처분이 법원에서 최종 취소됐다.
앞서 공정위는 해당 제재에 지배주주가 계열사의 사업 기회를 가로챈 행위에 대한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를 부여했는데 법원은 최 회장의 불복이 정당했다고 봤다.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최 회장이 실트론 지분을 취득한 것이 공정거래법상 ‘사업 기회 제공’에 해당하는지였다. 공정위는 일부 지분에 대한 공개경쟁입찰에 최 회장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것은 SK㈜(SK그룹의 지주회사)의 사업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최 회장이 정당하게 지분을 취득했다며 SK그룹이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6억 과징금 부과 3년 만에 전부 취소
대법원 2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지난 6월 26일 최 회장과 SK(주)가 공정위의 처분에 불복한다는 취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부과 처분 등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처분이 위법하다는 원심의 결론은 정당하다”면서 피고 측 상고를 기각했다.
앞서 2024년 1월 서울고등법원 행정6-2부는 공정위가 SK(주)와 최 회장에게 각 8억원씩 총 16억원 규모로 부과한 과징금 처분을 모두 취소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공정위 제재는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어서 불복 소송은 2심 법원인 서울고법에서 심리했다.
문제가 된 처분은 2021년 12월 이뤄졌다. 당시 공정위는 SK그룹이 LG실트론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최 회장에게 일부 지분을 양보한 것으로 보고 과징금과 향후 위반행위 금지 명령을 내렸다.
SK그룹은 2017년 1월 반도체 소재 시장에 진입할 목적으로 (주)LG가 갖고 있던 실트론의 주식 51%를 약 6200억원(주당 1만8139원)에 인수했다. 실트론은 국내 최초로 설립된 실리콘 웨이퍼(반도체 칩의 기초 소재) 제조 기업으로 인수 당시 주력 제품인 300mm 부문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4위에 오르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SK그룹은 같은 해 4월 사모펀드(KTB PE)가 갖고 있던 실트론 지분 19.6%를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통해 사들였다.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충족하고 단일 주주 출현을 막을 목적으로 잔여 지분을 추가 매입한 것이다.
우리은행 등 보고펀드 채권단이 갖고 있던 나머지 지분 29.4%에 대해선 입찰이 진행됐는데 SK(주)가 아닌 최 회장이 나섰다. 최 회장은 경쟁사보다 높은 가격(주당 희망가 1만2871원)을 써내 단독 적격투자자로 선정됐고 그해 8월 남아 있던 실트론 지분을 TRS 방식으로 확보했다.
그해 11월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는 SK(주)와 최 회장이 실트론 지분을 나눠 가진 것이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에 해당하는지 조사해달라고 공정위에 요청했다. SK(주)가 실트론 지분 전체를 매입할 여력이 충분했음에도 최 회장이 일정 지분을 소유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의혹이었다.
경제개혁연대는 경영권 프리미엄이 빠지면서 애초 매입가 대비 40%가량 할인된 값에 잔여 지분을 사들일 수 있었는데도 SK(주)가 합리적 이유 없이 최 회장에게 지분 취득 기회를 내줬다고 지적했다.
이듬해부터 3년간 조사를 진행한 공정위는 2021년부터 제재 절차에 착수해 그해 말 과징금 등 처분을 내렸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SK에 상당한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 기회”를 사익으로 편취해 구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2017년 10월 31일 개정 전 공정거래법) 23조의 2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해당 조항은 공시 대상 기업집단 소속 회사가 특수관계인에게 회사에 상당한 이익이 될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공정위가 총수(지배주주)의 회사 사업 기회 이용 행위를 제재한 건 역대 최초였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SK(주)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과 내부 정보 등을 활용해 계열사의 재산을 빼앗았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최 회장이 이를 지시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위반의 정도가 중대·명백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검찰 고발 조치는 제외했다.
이듬해 4월 SK(주)와 최 회장은 공정위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SK그룹 측은 최 회장이 해외 업체까지 참여한 공개경쟁입찰을 통해 실트론 지분을 투명하게 취득했고 SK(주)가 잔여 지분 29.4%를 마저 사들이지 않은 것은 최 회장에 사업 기회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경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고법 “최태원, 공정하게 지분 취득” SK 손 들어줘
서울고법은 공정위 처분이 구 공정거래법 23조의 2에 규정된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위법하다고 판결하며 SK 측 손을 들어줬다.
규제 대상이 되는 ‘사업 기회’에 해당하려면 회사의 부(富)가 해당 기회를 제공받은 특수관계인에게 실질적으로 이전됐어야 하는데 최 회장이 입찰을 통해 지분 가치에 상응하는 정상 가격으로 지분을 인수했기에 “편법적 부의 이전은 없었다”는 SK그룹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실트론 지분을 일부만 사들인 SK(주)의 결정이 합리적 사유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봤다. 웨이퍼 가격 동향에 따라 인수 지분 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손실을 볼 위험이 있었고 당시 SK그룹은 반도체 외에도 제약·바이오, 중국 물류·농축산, 건설 등 분야를 포함 총 4조6000억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한정된 재원을 선별적으로 집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9.6%의 추가 지분 인수만으로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70% 이상)을 충족해 단독 경영권을 행사하는 데 문제가 없던 상태였다는 점도 이런 판단의 근거로 작용했다.
SK(주)가 먼저 지분을 넘겨받은 KTB PE와 체결한 양해각서에서 제삼자로부터 실트론 주식을 매수할 경우 매매 대금의 40%를 위약벌로서 매각 주체 등 상대방에게 지급하도록 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점도 SK(주)가 입찰에 불참한 합리적 이유로 받아들여졌다.
입찰을 주도한 우리은행이 SK(주)와 공모해 최 회장의 지분 인수를 도왔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재판부는 봤다. 입찰은 투명하게 이뤄졌으며 최 회장이 가장 높은 입찰 가격을 써냈고 자금조달 능력도 확실했기에 공정하게 적격투자자로 선정됐다는 것이다.
[돋보기]
대법 ‘사업 기회 제공’ 구체적 판단기준 제시
대법원 역시 “계열사가 다른 회사를 인수하며 다수 지분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소수 지분 취득 기회를 포기하고 그 지분을 특수관계인 등이 취득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사업 기회의 제공 행위가 곧바로 추단되지는 않는다”며 원심판결에 문제가 없었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은 “원심의 이유 설시에 일부 부적절한 부분이 없지 않다”면서 구 공정거래법상 부당 지원행위인 ‘사업 기회 제공’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사업 기회 제공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로 “해당 계열사가 소수지분 취득 기회를 규범적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유’의 의미에 대해선 “사업 기회의 내용, 계열사의 사업 범위, 계열사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권리·이익·기대 및 지위 등을 포함한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며 “반드시 계열사가 사업 기회를 우선적·배타적으로 지배·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라는 법리를 들었다.
사업 기회의 제공은 계열사가 유망한 사업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특수관계인이 이를 취득하는 것을 묵인하는 ‘소극적’ 방식으로도 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제공이 적극적·직접적 제공과 동등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개별적·구체적으로 심사해 봐야 한다”고 대법원은 판시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공정위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SK(주)가 최 회장에게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결했다.
장서우 한국경제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