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⑥1950년 7월 김홍일: 한강의 수호자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군인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구에서 적색분자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산으로 가시려면 대구 쪽이 아니라, 목포로 이동해 배를 타셔야 합니다.”

1950년 7월 1일 0시, 대전엔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울을 잃고 대피한 대통령 이승만은 충남지사 관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 북한군이 한강을 넘고 수원을 거쳐 대대적으로 남하 중이라는 급보가 들어왔다. 출처는 미국 종군기자 월터 시몬스. 한국전쟁 발발을 세계 최초로 전한 유력 언론인의 얘기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각료와 비서들은 충격에 빠졌다. 서울에서 몸을 피해 대전으로 온 게 며칠 전이다. 그런데 한강방어선이 사흘도 못 버티고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수원에서 대전까지는 별다른 지형 장애물도 없어, 북한군 전차가 금방 당도할 것이다. 대통령이 생포되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남쪽으로 더 가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부부가 대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

새벽 3시 20분 주한 미대사관 1등서기관 해럴드 노블이 관사에 도착해 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내외분께서 가능한 한 빨리 남쪽으로 피하셔야 한다는 대사님(존 무초 미 대사)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노블의 회고록을 보면, 노블과 이승만은 대피 문제로 거의 한 시간 동안 옥신각신했다. 이승만은 “또 도망을 가서 수모를 겪느니 여기서 죽겠다”며 버텼고, 노블은 대피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먼저 마음을 돌렸고, 뒤늦게 도착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총참모장이 대피에 힘을 실어주면서 이승만도 대전을 떠나는 데 동의했다. 대통령 부부, 이철원 공보처장, 비서 2명, 김장흥 총경(경호책임자), 경호경관 4명으로 이뤄진 단출한 대피 행렬이 어둠을 뚫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것은 그냥 군과 경찰이 잘 싸우고 있다는 말뿐이었다. 적을 몇 명 사살했고, 우리 피해는 얼마이며, 얼마를 전진 또는 후퇴했는지 등 구체적 사항이 없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1950년 7월 2일 회고)

이승만의 이상한 후퇴



이상했던 건 대통령이 택한 대피 경로다. 경부선 철도로 대전에서 대구까지 몇 시간 만에 곧장 갈 수 있었음에도, 실제 동선은 호남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대전에서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차로 이동하고, 이리에서 목포까지 열차를 이용한 뒤, 목포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이마저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리역에 도착해서야 대전에 있던 교통장관에게 따로 연락해 열차편을 마련했다. 그 바람에 7월 1일 새벽 대전을 출발한 이승만은 이튿날 오전 11시에 겨우 부산항에 도착했다.
한곳에 자리를 잡고 전쟁을 지휘했어야 할 군통수권자가 가장 위급한 때 30시간 넘게 자동차, 열차, 배를 바꿔 타며 줄곧 대피만 했던 것
이다.

왜 그런 동선을 택했을까. 당시 이승만 비서 황규면의 회고를 보면 ‘대구에서 좌익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고 한다. 전방이 불확실하고 후방 상황에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 측근과 경호 책임자들은 멀더라도 안전한 경로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로당은 후방 도시가 이미 북한군 손에 들어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었다. 일주일을 부산에 머물던 이승만은 7월 9일 대구로 북상한다.

이승만의 오락가락 대피는 처음이 아니었다.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이승만은 열차 편으로 대구까지 남하했다가, 너무 많이 내려왔다 싶어 다시 대전으로 북상했다. 이 두 차례 대피 때문에 나중에 이승만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혼자서 장관들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피했다는 지적, 심지어 제주도 피신을 염두에 두고 호남행을 선택한 게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다. 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 △비서 황규면 △1등서기관 노블 등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이승만 자신은 대전 이남으로의 대피를 강하게 거부했던 게 확실하다.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겁을 먹고 줄행랑쳤다기보다는, 전선의 상황이 군 통수권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대통령이 우왕좌왕했다고 보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
이다. 그만큼 당시 권력 수뇌부와 군 지휘부가 북한 남침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전쟁이 터지고 나서도 자국군의 전투 상황마저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 소동이다.

전쟁 중에 최고지도자가 적의 예봉을 피해 근거지를 옮겨 훗날을 도모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시 군통수권자가 전방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방향으로 대피하고 말았던 어이없는 실책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부산까지 대피하던 와중에, 서울의 진짜 상황은 어땠을까? 모두가 ‘다 뚫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강방어선은, 실은 그때도 멀쩡히 살아남아 꿋꿋하게 북한군의 맹공에 버티고 있었다. 누군가 후퇴하던 패잔병들을 돌려세워 한강 남쪽에서 필사의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모래알을 찾아 하나하나 자루에 다시 담는 일, 그 불가능한 대업을 해낸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김홍일(당시 육군 소장)이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놈들(일제)의 발굽 아래 정의가 유린되고 민족으로서 인간으로서 권리가 말살되는 마당에, 우리가 취할 길은 오로지 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김홍일 회고록 ‘대륙의 분노’)

국군 장군이 된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인생은 매우 극적이고 다층적이다.
①조선 땅에서 태어나 ②일제 치하에서 교편을 잡고 ③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뒤 ④중국에서 장제스군에 합류한 다음 ⑤조국 광복 후 국군 장군으로 임관했다. 군문을 떠나선 ⑥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⑦박정희 군정의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결국 ⑧박정희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
했다. 이력 자체가 ‘격동의 한국 현대사’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동적이다. 중국(2성장군)과 한국(3성장군)에서 군 최고위직까지 오른 실력파 군인이고, 대한민국 건국훈장과 무공훈장을 둘 다 받았다.

김홍일은 1898년 평북 용천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황해도에 교사로 부임했다. 민족의식을 앞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지만 일경(日警)의 탄압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구이저우성 군사학교(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군사학교 졸업 후 포병장교로 임관했다.

1921년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참변(소련 적군의 한인 독립군 진압)의 시련을 겪고, 이후 대한의용군 중대장 등으로 항일 투쟁을 하다 1925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세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국민혁명군(국민당군) 소속으로 장제스의 북벌(국민당의 통일 전쟁)에 참여해 승진을 거듭했다. 상하이 병기창에서 일하던 김홍일은 김구 등 한인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는데,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일왕 폭탄 투척)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폭탄을 제공하기도 했다. 약산 김원봉이 군관학교를 세웠을 때도 후원자로 나섰다.

김구(가운데) 선생이 윤봉길 열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왼쪽), 중국 국민당군에서 활약하던 김홍일과 함께 찍은 사진. 김홍일 장군 기념사업회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는 사단 참모장, 집단군 참모처장, 사단장 등 고위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군 격퇴에 공을 세웠다. 1945년엔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 중이던 한국광복군에 참여해 참모장을 맡았는데, 당시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장제스가 김홍일을 불러 “임시정부 형편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귀관을 보내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시 장제스군으로 돌아가 중장(2성장군)까지 진급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육군 준장으로 임관했다.

이력에서 보듯
김홍일은 1950년 6월 당시 국군 내에서 가장 실전 경력이 풍부한 장군
이었다. 당시 총참모장 채병덕(35), 육군본부 참모부장 김백일(33), 1사단장 백선엽(30), 6사단장 김종오(29), 7사단장 유재흥(29), 수도사단장 이종찬(34) 등과 비교할 수 없었던 백전노장이다. 그러나 가장 노련한 장군의 전쟁 발발 당시 직책은 비전투 보직인 육군참모학교장이었다. 북한군 10개 사단이 38선 전역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시작한 순간, 군에서 가장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했던 장군에게 정작 휘하 병력이 없었다.

1950년 6월 한강 다리를 건너는 북한군 전차의 모습.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한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했다. 한국은 무너지고 있으며, 김포와 서울이 넘어갔다.”
(미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 중장의 1950년 6월 28일 일기)

사흘 만에 무너진 서울



젊은 군 수뇌부는 임명권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중동부전선(춘천·홍천)에선 김종오의 6사단이 북한군의 첫 공격을 격퇴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서부전선(옹진반도·개성·파주)의 1사단과 중서부전선(동두천·포천)의 7사단 방어선에선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암울한 소식이 이어졌다.

가장 왼쪽, 월경지(본토에서 따로 떨어진 영토)인 옹진반도에선 17연대(연대장 백인엽)가 하루를 채 버티지 못하고 26일 새벽부터 배를 타고 인천으로 철수했다. 파주 방면 백선엽의 1사단은 개전 이틀 동안 임진강 방어선에서 잘 버텼으나, 사단 병력 3분의 1이 휴가를 떠난 상황에서 중과부적으로 27일 아침 최후방어선인 봉일천 쪽으로 후퇴했다. 1사단 오른쪽 동두천-의정부-서울 축선을 담당한 7사단(사단장 유재흥)은 전쟁 첫날 동두천, 둘째날(26일) 의정부를 내주며 서울 바로 위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동두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의정부 회랑’이 활짝 열렸고, 창동과 미아리고개에 쳤던 방어선이 차례로 힘없이 무너졌다. 6월 28일 오전 1시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까지 진출했고, 오전 10시엔 한강 가까운 삼각지에 북한군이 출현했다.

정부와 군은 시민들 몰래 서울을 포기했다
. 정부는 6월 26일 밤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수원으로 거점을 옮기기로 했다. 6월 27일엔 육군본부와 미군사고문단이 서울을 떠났다. 국군 병력도 모두 한강을 넘어 철수해, 28일 아침 서울 시내엔 시민들만 남아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기만했다
. 당시 서울대에서 강의하던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의 일기(‘역사 앞에서’)를 보면, 서울 함락 전날인 6월 27일 국방부는 라디오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 지소(支所)가 오늘 서울에 설치되고 내일부터 미국이 직접 전투할 것이니, 장병과 국민은 맡은 바 전선과 직장을 사수하라”는 내용을 줄기차게 방송했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과 국방부는 그날 서울을 떠났다. 그렇게 빼앗긴 서울에선 북한군 치하 90일 동안 2만2,000명의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6.25 당시 남북한군 배치와 북한의 돌파계획. 그래픽=이지원 기자


“수원 육본 지휘소에 가니 채병덕 총참모장이 수일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대화 중에도 코를 골며 잠꼬대를 하는 처지였다. (채병덕은) 작전을 지도할 정신적 체력적 여력이 없었다.”(김홍일이 기억하는 1950년 6월 28일 육본 상황)

한강에서 사흘만 버텨라



한강을 겨우 넘어 후퇴한 국군 잔여 병력은 최악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국군의 힘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했다
. 미군 투입이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미 육군 사단급 이상 병력이 한반도에 전개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이렇게나 빨리 뒤로 밀려면 미군도 도와줄 방도가 없었다.
미군 도착 때까지 시간을 최대한 끄는 ‘지연전’이 필요했다.


천혜의 요충지인 한강에 빨리 저항선을 구축하고, 전방에서 삼삼오오 도착한 후퇴 병력을 추슬러 방어선에 투입해야 했다. 그러려면 여기저기 흩어진 각 사단을 통제할 군단급 사령부가 필요했다. 전시 상황에서 사단급 이상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국군 장군이 바로 김홍일이었다. 총참모장 채병덕은 6월 28일 낮 12시 김홍일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의 원래 임무는 사흘을 버티는 것이었다. 당시 김홍일을 만난 미군 고문관 로버트 헤이즐렛 중령은 “미24사단(일본 큐슈 주둔)이 오려면 최소 사흘은 필요하다”며 “3일 이내에 북한군이 한강을 넘으면, 부산에 상륙하려던 미군도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을 버티느냐 그 전에 무너지느냐. 김홍일의 임무 완수 여부에 군의 명운,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었다.

김홍일은 곧바로 ‘혼성부대’를 조직했다. 전방 사단이 편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후퇴했기 때문에, 병력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그래서 원 소속부대를 무시하고, 집결지에 모인 병력이 500명에 이르면 ‘혼성대대’라는 이름을 붙여 한강 방어 지역에 급파했다. 그렇게 사단까지 재조직한 뒤, △혼성수도사단을 양화교-신길동 △혼성7사단을 대방동-동작동 △혼성2사단을 이수동-신사동 전선에 각각 투입했다.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찍은 한강 다리 폭격 장면. 오른쪽에 보이는 끊어진 다리가 한강대교(인도교)이고, 왼쪽에 보이는 다리가 한강철교다. 한강철교는 상류(동쪽)에서부터 경인하행선, 경인상행선, 경부복선 등 세 개로 이뤄져 있다. 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위키미디어 커먼즈)


시흥사령부는 외견상으론 군단급 편제였으나, 실제 각 혼성사단의 병력은 연대 수준이 될까 말까 싶게 턱없이 모자랐다. 장비 부족도 심각했는데, 육본 지휘부가 일선부대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각 사단에 보급해야 할 물자를 실은 차량 1,318대가 한강 북쪽에서 발이 묶였다. 1개 연대가 보유한 공용화기가 박격포 두세 문, 기관총 대여섯 정이 전부였다.

하지만
김홍일의 시흥사령부 부대는 병력과 장비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용케 버텨냈다
. 며칠간 한강을 사수하던 시흥사령부가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한 결정적 계기는 북한군의 한강철교 보수 완료였다. 북한군 전차가 한강철교를 건너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까지 진출하자, 전차에 대항할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김홍일은 어쩔 수 없이 예하 사단에 안양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가 7월 3일 오전. 결국 김홍일이 한강방어선을 유지한 기간은 6일이다. 미군이 목표로 걸었던 3일의 두 배다.

국군은 앞서 6월 28일 새벽엔 민간인이 건너고 있던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대규모 사상자를 냈는데, 정작 그 옆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하지 못해 북한군이 며칠 만에 다리를 고칠 기회를 내주고 말았다. 신사동과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 쪽에서 북한군 진격을 허용하긴 했지만, 한강다리만 제대로 파괴됐더라면 노량진과 영등포 쪽 병력은 며칠을 더 버틸 수도 있었다.

한강방어선 전투 경과. 그래픽=김대훈 기자


“맥아더는 동양맥주 공장(현 영등포공원) 언덕 위 진지에 올라 20분가량 적의 손에 들어간 서울 시가지, 시뻘건 한강, 한강 남안의 밋밋한 대지를 봤다. 그는 거기서 미군 지상군이 투입되어야만 한국을 침략군으로부터 구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3권)
1945년 8월 필리핀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미해군역사센터


김홍일 버티기의 나비효과



한강방어선 전투는 국군이 군단(야전군과 사단의 중간 단계, 2개 이상 사단으로 구성)급 편제를 이뤄 싸운 첫 전투였다. 전쟁 발발 당시는 육본이 중간 사령부 없이 각 사단을 직접 지휘하는 구조였다. 총참모장 채병덕의 역량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서울의 사령부가 전방 상황을 일일이 챙길 수도 없어, 사실상 사단장이 알아서 작전을 펼치는 실정이었다. 북한군과 소규모 전투 정도는 사단장 재량으로 가능하겠지만, 사단끼리 협조가 불가능한 지휘 체계로 대규모 전면전에 대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인접 사단장들끼리도 서로 소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따로 놀았다. 일례로 서울 함락 직전인 6월 28일 새벽 5사단장 이응준은 “7사단장(유재흥)이 전사했을 것”이라고 육본에 보고했지만, 실제 유재흥은 당시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여러 사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유기적 협조 체제를 구축하며, 시시각각 전황을 판단하면서 병력의 배치 및 투입을 조정하는 ‘거시적 안목’을 지닌 사람은 당시로선 김홍일이 유일
했다. 한강방어선이 예상보다 오래 버틴 이유로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잠시 시간을 끌었던 점 △중화기도 없이 소총으로만 버틴 일선 장병들의 용기와 희생 △지상군보다 먼저 투입된 미 공군의 신속한 폭격 등 여러 요인을 꼽을 수 있지만, 선택과 집중을 통해 부족한 역량으로 최선의 결과를 낸 전투사령탑 김홍일의 공적이 매우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강 남안 사수전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6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의 최전방 시찰
이다. 이날 새벽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한 맥아더는 오전 10시 39분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국군 수뇌부를 만났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맥아더는 한강방어선을 자기 눈으로 꼭 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부하들은 안전 문제로 맥아더의 북상을 만류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뜻을 꺾지 않고 서울 쪽으로 올라가 최전선 기지를 방문했고, 이승만은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다.

당시 맥아더를 수행한 시흥사령부 참모장 김종갑 대령의 회고를 보면, 맥아더는 영등포 동양맥주 공장 뒤 언덕에 설치된 국군 8연대 기지에서 한 국군 일등중사(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 텐가?” 일등중사가 답했다. “상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죽는 그 순간까지 지킬 것입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내가 곧 도쿄로 돌아가 지원 병력을 보내줄 테니, 안심하고 싸우게”라는 약속을 남겼다.

트루먼의 생각을 바꾼 맥아더의 현장시찰. 그래픽=김대훈 기자


맥아더는 약속을 지켰다. 워싱턴에서 사태를 예의주시하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에 지상군을 투입하면 소련과의 직접 대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래서 6월 29일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서 “해공군으로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되, 지상군 투입은 필요한 규모로만 국한한다”는 어정쩡한 명령을 맥아더 사령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한강 시찰 후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 “국군의 방어 능력이 이미 상실되어 미군 지상군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본국에 타전
했다. 극동에서 맥아더가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을 감안한 트루먼은 지상군 투입 제한 명령을 다시 검토했고, 결국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을 포함한 전권을 위임했다.

전쟁 전 북한과 소련은 남침 계획을 짤 때 ‘미 지상군의 투입 가능성이 높지 않고, 미 육군 사단이 투입되더라도 한국에 전개되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이런 빠른 판단 덕분에 미24사단 선봉부대(스미스 특임대)가 전쟁 발발 6일 만인 7월 1일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24사단 예하 34연대와 포병연대가 7월 2일, 19·21연대가 7월 4일 한국에 도착했다. 미 해·공군은 이미 그 전에 한반도 작전을 시작했다. 6월 29일 미 공군 B-29 폭격기가 평양 상공에서 첫 번째 폭격 작전을 수행했고, 같은 날 미 해군11은 동해와 서해를 동시에 장악해 양쪽 바다에서 북한 점령지에 대한 함포 사격을 시작했다.

결국
①김홍일의 빠른 방어선 구축이 ‘미군 최대의 거물’ 맥아더의 전선 시찰을 가능하게 했고 ②그 방어선을 직접 눈으로 본 맥아더가 미국 대통령을 단번에 설득하자 ③미 지상군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투입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④이때 방문에서 이미 맥아더는 인천 또는 다른 서해안 지역으로의 상륙을 결심
했다.

김홍일의 한강방어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국군은 서울 남쪽에서 포위 섬멸을 당하거나, 최소한 조직이 와해되는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한군은 7월이 오기 전 최소 수원까지는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강에서 금강까지는 별다른 지형 장애물도 없어, 대전도 순식간에 빼앗겼을 것(실제로는 7월 20일 함락)이다. 미군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것이고, 북한은 예정대로 한 달 안에 남한 전역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홍일이 한강에서 선전한 나비효과가 이렇게나 거대했다.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제치고 당수로 선출된 김홍일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독재에 저항한 김홍일



한강방어선 전투 이후 시흥사령부는 국군 사상 첫 군단인 1군단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1군단장은 당연히 김홍일이었다. 김홍일은 1군단을 지휘해 소백산맥 지연전(7월)과 낙동강 방어선 전투(8월)에도 관여했다.
전쟁 초반 국군 장군들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전공
을 남겼다.

그러나 김홍일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9월 1일 1군단장에서 해임돼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전출됐다. 후임 1군단장은 사단장 경험도 없었던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 준장(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다. 잘 싸우고 있던 지휘관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교체한 경위에 대해 당시 육군 총참모장 정일권은 “고령의 장군이 격전을 치르면서 지쳐 있어서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홍일 해임당하던 바로 그날 북한군이 영천에서 최후 공세를 시작했던 절박한 상황을 감안하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회고는 김홍일이 미군과의 불화 때문에 경질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1950년 8월 29일 프란체스카의 일기를 보면 ‘김홍일 장군이 미1군단장 존 콜터 소장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고, 8월 31일 일기를 보면 ‘김홍일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미군 쪽에서 교체 요구가 있었다’는 국방장관 보고가 있었다. 이밖에도 당시 국군 내부의 고질적인 파워게임(일본 육사 출신과 만주군 출신의 알력)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추정이 존재한다.

그렇게 전쟁 두 달 만에 한직으로 밀려난 김홍일은 다음해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해 대만 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 현지 대만 유학생들의 항의를 받은 뒤 대사 직을 그만뒀고, 한국으로 돌아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 외무장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김홍일은 박정희의 외무국방 담담 고문을 맡았지만, 1963년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대통령 출마)하려하자 실망해 군사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65년 8월엔 한일 수교에 반대하다가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재선에 도전한 1967년부터, 김홍일은 정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신민당 창당에 적극 관여한 이후 68세 나이로 처음 국회에 입성했고, 나중에 부정선거 규탄 운동과 박정희 3선 개헌 반대운동에 앞장선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비상계엄을 선포(10월 유신)했을 때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홍일은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편안한 길을 걷지 않았다.
외롭고 고된 곳으로만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망국의 설움을 겪던 교육가였다가, 망명정부를 지원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고, 군인으로서 백척간두 조국을 지키더니, 말년에는 군사정권 보호막을 거부하고 백발의 반독재 투사로 변신
했다.

6.25 이후 이 땅에서 이름을 떨친 장군들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친일 행적 △좌익 가담 △독재 찬양 중 어느 하나 정도는 어두운 면을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①독립운동가 ②반공주의자 ③반독재투사로 살았던 김홍일의 행적은 독보적이다. 현대사를 통틀어 ‘올바른 군인’의 표상으로 손색이 없는 인물이 바로 김홍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김홍일의 독립운동>
-한시준·김영철 ‘김홍일 장군의 생애와 광복군 활동’
-쑨커지·유호인 ‘김홍일의 독립운동과 항전 활동’
-김지훈 ‘김홍일의 중국 국민혁명군 경험과 국방개론 저술’

<김홍일의 6.25 활약>
-남정옥 ‘김홍일 장군의 한강방어전투와 전사적 평가’
-김영환 ‘6.25전쟁 초기 지연전의 지휘와 성과’
-이동원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

<김홍일의 전후 행적>
-이동해 ‘1960~70년대 김홍일의 정치활동’

<당시 전황>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②, ③, ④
-윌리엄 와이블러드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주요 인물의 행적>
-Harold Joyce Noble ‘Embassy at War’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프란체스카 도너 리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당시 서울 상황>
-김성칠 ‘역사 앞에서’
-서울역사편찬원 ‘6.25 전쟁과 1950년대 서울의 사회변동’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0802 이 대통령, 일본 기자에 “우리 점심 했죠? 중국분과만 했다고 가짜뉴스” new 랭크뉴스 2025.07.03
50801 이 대통령 "대출 규제는 맛보기... 수요 억제 등 부동산 정책 많다" new 랭크뉴스 2025.07.03
50800 [속보] 김민석 총리후보 인준안 투표 돌입…국힘 표결 보이콧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9 [르포] 입주 시작한 서초 메이플자이, 대출 규제에 혼란… “세입자 못 구해 발동동”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8 이 대통령 “검찰 개혁 자업자득…추석 전 얼개 가능할 듯”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7 [단독] 삼수 끝에 들어간 '하이브' 압수수색‥방시혁이 받은 논란의 4천억 원 [인싸M]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6 이 대통령 “대북방송 중단, 北 호응 기대 이상”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5 추미애 "김용현, 무인기 보낸 날 드론사에 격려금 지급‥특검서 밝혀야"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4 '3천억 대 횡령' 경남은행 전 간부, 징역 35년 확정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3 "21만원짜리를 단돈 1900원에 판다고?"…알리익스프레스 '꼼수 키워드' 황당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2 "중국 때문에 다 망했다"…'세계 최고 수질' 울릉도에 가득 쌓인 '이것' 뭐길래?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1 어린이체험관 주차장서 3세 여아 차에 치여 사망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90 9차례 걸쳐 미성년자 성폭행·학대 50대 공무원···“도주 우려” 구속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9 文도 尹도 비워둔 '특별감찰관'‥이 대통령 "임명 검토" 지시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8 “친윤계 중진 총선 불출마, 2선 후퇴 선언해야” 국힘 내 인적 쇄신 요구 분출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7 이재명 대통령 "수사·기소 분리 이견 없어‥추석 전까지 정리"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6 홍준표, 신당 창당 시사 "물극필반…국힘 대체 정당 나올 것"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5 국민의힘, '김민석 총리 인준' 표결 불참‥상법 처리는 참여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4 이 대통령 “부동산 대출 규제는 맛보기…수요 억제책 많이 남아” new 랭크뉴스 2025.07.03
50783 [단독] “군생활 38년 독고다이”… ‘구명 로비’ 진술거부, 임성근의 말 new 랭크뉴스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