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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어느 스타트업의 CEO입니다. 투자금을 댈 속칭 '쩐주'를 만나기 직전입니다. 가장 떨릴 질문은 뭘까요.

“혹시, 상장했나요?”

회사 이름, 사업 내용 보다 상장 여부부터 묻는 일 종종 있습니다.

상장사와 비상장사는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입니다. 신용도, 투자금, 홍보, 인재 채용까지…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이 상장에 목숨을 거는 이유입니다.

■ 상장은 아무나 하나?

'상장'은 아무나 나눠주는 티켓이 아닙니다.

일정 매출 있어야 하고, 이익도 나야 하고, 회계감사도 통과해야 합니다. 꽤나 빡빡한 문턱입니다.


■ 이 매출로 상장을!

주요 입시엔 '특례 제도'가 있죠.

시험 점수는 좀 부족해도, 고려할 만한 배경을 가졌거나 예체능 같은 특정 재능이 뛰어나면 합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주식 시장 버전이 '기술특례상장'입니다. 돈은 못 벌어도 기술력이나 성장 가능성만 있으면 됩니다.

깐깐한 상장 심사를 통과할 자신이 없는 기업을 위해 따로 문을 하나 열어둔 격입니다.

기술특례상장은 2005년 처음 도입됐습니다. 올해로 만 20년째입니다.

지금까지 이 제도로 260개 기업이 상장했습니다.

최근 삼성전자 자회사로 편입된 로봇회사 레인보우로보틱스도 기술특례상장을 한 기업입니다. 매출 없이 기술력만으로 코스닥에 입성했습니다.

순기능이 분명히 있다는 얘기입니다.

적자 기업도 기술력만 있다면 상장을 시켜주는 ▲중국의 STAR Market ▲대만의 Catalist 마켓 ▲홍콩의 Growth Enterprise Market의 한국판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할…미래 기술 유망주들에게 사업 확장의 기회를 주자는 게 취지입니다.


■ 5만 명의 1조 원, 공중분해

2018년, 셀리버리는 ‘파킨슨병 치료제’ 상용화라는 거대한 꿈을 앞세워 상장합니다. 기술특례상장의 하나인 '성장성 특례상장 1호 기업'이라는 명예도 안게 됩니다.


상장 당시 투자보고서에 적힌 2019년 예상 매출액은 190억 원.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2019년 매출액은 45억 원, 2020년엔 반토막(20억 원), 그다음 해는 다시 반토막(7억 원).

매출 30억 원 이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상장폐지의 길을 걷게 되지만, 셀리버리는 달랐습니다.

기술특례상장은 관리종목 지정을 5년간 유예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회를 더 받았지만, 일은 꼬이기만 했습니다.

신약 개발 계획이 허위였다는 혐의가 드러났고, 대표는 구속기소 됐고, 결국 상장 폐지됐습니다.

투자자 5만여 명이 낸 약 1조 원이 사실상 공중분해 됐습니다.


KBS는 기술특례상장 회사 260 곳의 매출과 현황을 전수 조사했습니다.

매출 1,000억 원 넘긴 기업은 단 12곳. 비율로 치면 4%에 불과합니다.

'5년 유예기간'이 끝난 기업 76곳 가운데 16곳( 21%)이 관리종목으로 지정됐습니다.

‘기술 유망주’를 뽑는 관문이 ‘좀비 주식’을 양산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관 기사] RNA 신약 대신 미용 사업…검증 없는 ‘뒷문’ 상장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86720

■ RNA 신약 개발한다더니…

2019년 기술특례로 상장한 A 기업이 있습니다. 지금은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상장 심사 당시 RNA 기반 신약을 만든다는 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코스닥 상장 이후 행보는 어땠을까요.

사업 내역을 쭉 보니 미용기기 유통, 부동산 임대업, 반려동물 용품 판매까지.

RNA 신약 기술을 아무리 넓게 정의해도, 관련성을 도저히 찾기 어렵습니다.

상장할 때만 바이오 기술을 내세우고, 상장 이후에는 엉뚱한 사업을 한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 거래소는 뭐하길래

기술특례 기업은 상장 심사 전에 ‘기술평가기관’이라는 곳에서 검증을 받습니다.

나름 기준도 있습니다. 논문이나 특허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는데, BBB등급 이상이 나와야 상장 자격이 생깁니다.

BBB등급이란 "기술력이 동종업계 대비 다소 높고, 기술환경 변화에 보통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며 미래 성장 가능성이 양호한 수준"입니다.

이 기술 평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습니다만, 모든 정성평가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로 이해할 만한 지점도 있습니다.

"평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최근 '트렌드'인 기술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엔 바이오, 최근엔 인공지능이 대세인 것처럼...."

"평가기관들의 전문성도 의심이 갈 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가진 기업인데, 어떤 기업은 통과하고, 어떤 기업은 탈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술상장특례 컨설팅 업체 B 대표

더 중요한 건 사후 관리일 겁니다. A라는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했다면, 최소한 A 기술에 열심히 매진하기는 해야겠죠.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그런 최선을 다 안 했다면, 일종의 벌칙도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상장 이후에는 일반상장이나 기술특례상장이나 사후 관리에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 일반기업과 동일한 기준으로 사후 관리합니다. 매출액은 잘 유지되는지, 회계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기술'은 상장 심사 때만 본다는 얘기입니다. 심사만 통과하면 그 이후에는 무풍지대인 셈입니다.


사업 내용을 바꿨다면 기술 변경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하거나, 상장 후 일정 기간마다 기술 개발 진행 상황을 공시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기술평가 기관의 책임을 강화해 사후 추적관리까지 하도록 하는 방식도 좋습니다.

상장 심사 전엔 더 정밀하게, 상장 후엔 더 깐깐하게 관리하는 개선책이 시급합니다.

그래야 '기술특례상장'이 명실상부 기술 유망주의 타이틀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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